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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을 8명, 사령을 10명으로 하여 우수영에 둔다 하고 편 제까지 명시해 놓았으니 이만 보더라도 당시 적지 않은 규 모의 鎭이 이곳에 있었으리라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400년 이 지난 지금은 당시의 위용은 사라지고 본관 건물 하나만 덩그라니 남아있다. 그나마 한쪽 벽은 일반 가옥과 담을 같 이 하고 있어 보다 세심한 관리가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마 당 한켠에 나란히 서 있는 비(碑)는 공덕비인 듯 하나 애써 읽어보려 해도 이제 글씨 형상조차 알아보기 어렵다. 세월 의 흐름은 후세의 관심까지도 덧없게 만드는지도 모른다. 다시 길을 나서 찾은 곳 은 내원암. 그리 멀지 않 은 거리에도 굳이 차소리 를 붕붕대며 찾은 내원암 은 도시인의 경박함을 나 무라듯 너무나 조용한 자 태로 방문객을 맞는다. 사 찰이라기보다는 마치 암 자라 해야 어울릴 듯 자그 마한 규모의 내원암은 뜰 앞에 한창 소담스레 피어 난, 아마도 내원암과 같이 심어졌을 법한 수백 년 된 아름드리 백일홍 나무와 함께 그 운치를 더하고 있 다. 조선 숙종 당시‘소지 분인’이름을 가진 부인이 잉태를 하자 귀동자를 얻 을 양으로 숙종 임금께 진 언하여 마침 인도에서 수 도를 마치고 돌아온 자장율사에게 친필로‘내원암’ 이라 하 명하시어 이곳 위도‘절골’이라는 곳에 사찰을 지었으나 곧 불타 없어지고, 지금의 지풍금 위치에 자장율사가 새로 지 어 인도에서 옥의로 된 세존상을 모셔 와 봉안하였다는 안 내문이 한 편에 걸려있어 궁금증은 풀었으나 여염집의 아담 한 정원을 연상시키는. 이 곳은 절터가 여인의 자궁을 닮은 형상이라 하여 지금도 아들을 기원하는 뭇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하니, 사찰의 효험은 긴 역사만큼이나 세상 인생살이와 함께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시간은 어느 새 다시금 일 상생활로 돌아갈 것을 재촉하 고 있다. 마치 어여쁜 여인을 두고 먼길을 떠나는 심정이 이럴까.... 떼어놓는 발걸음이 천근 만근 무겁다. 아쉬움 속에 서둘러 배시간을 확인하며 기다리는 동안, 매표소의 한 직원은 이 곳 섬사람들의 생활이 예전과 많이 달라졌음을 실토한다. “핵폐기장 들어선다 헌께 뭍에 있던 사람덜이 겁나 게 많이 들어와 살고 있지요잉, 여그 사람들도 있지만 서울 사람덜도 겁나게 들어와서 땅사돌라고 달겨드는 통에 땅값이 겁나게 뛰었당께요” “그래도 폐가나 빈 집들도 많던데 그런 곳은 좀 싸 게 살수 없나요?”필자의 노후를 걱정하는 속셈이 담 긴 물음에도 좀처럼 시원한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요즘 땅이고 집이고 파는 사람이 없어요. 누구나 사겄다고 헌께....더 올라라 허고.... 요....아래만 해 도 평당 땅값이 30만 원은 훌쩍 넘게 달라고 헐틴디 ....” 위도는 섬이기는 해도 육지와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어느 새 유명 휴양지로 그 모습이 점차 변해가고 있었다. 더욱이 잘 닦여진 도로는 아름다운 자연 풍광과 몇 번의 매스컴 덕 에 한껏 더 많은 관광객을 맞을 준비로 분주해지고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치일 것이지만 이런 곳에서 세상을 일 탈하고 자연과 동화되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을 산다면 얼마 나 행복할 것인가.... 마음 한켠에서 마냥 솟구치는 욕심은 필자만이 아닌 이 곳을 찾는 모두의 바램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굳이 땅사고 집사서 살지 못하면 어떠랴. 몸과 마음이 지치고 조용한 휴식을 찾아야 할 때 그나마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이렇듯 평화롭고 아늑한 숨결로 우 리를 반겨주는 섬‘위도’가 있음은 찾는 이 모두에게 충분 한 위로가 되고도 남음이 있다. ‘위도’ , 주말여행의 위도는 우연히 찾아 낸 보물치고는 매우 소중하고도 값진 보물이었다. 내원암 앞뜰의 수백년된 백일홍 내원암의 전경 해군/2005. 1~2 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