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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2003. 5~6 74 해군 글광장 어머니와 통장 봄비가 내리는 날이면 문득 몇 해전의 그날이 새롯이 피어 오른다. 그 날도 벚꽃이 떨어져 빗물에 젖은 꽃잎들이 온 거리를 하얗게 수놓은 것이 흡사 한겨울 눈밭처럼 느껴지는 포근한 주말이었다. 그때, 나는 함정인수 선발대로 선발되어 마산 타코마에서 함대원들과 함께 하루 하루 짜여진 일과에 따라 혼신의 힘 을 다해 업무에 쫓기던 시기였다. 때문에 고향 집에 홀로 계시는 어머님을 자주 찾아 뵙는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님을 자주 찾아 가지 못한 것이 늘 마음에 죄스럽게 느껴지던 어느 날! 드디어 어머님을 찾아 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함 대원들의 사기와 복지에 남달리 신경을 쓰시는 함장님께서 '바쁘지만 외박은 가족을 위해서 반드시 다녀오라'는 지시를 내렸고, 때 마침 나는 그 주에 외박을 가게 되었다. 몇일 전부터 마치 어린 시절, 소풍가던 전날 밤에 느끼던 설레임처럼 어머님을 뵌다는 생각에 좀체로 잠이 오질 않았다. 토요일 오후라 그런지 많은 차량들로 다소 지체 되었지만, 마산 시내를 벗어나자 고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의외로 한산했다. 차창에 부딪치는 봄비는 가로수와 풀잎들을 더욱 싱그럽게 부풀리고 있었으며, 언땅을 뚫고 겨우내 달려 온 수많은 들꽃들은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듯이 들뜬 나의 마음을 더욱 설레이게 했다.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저 만큼 정자나무 아래에 어머님이 나와 계셨다. 모처럼 아들이 온다는 연락을 받으시고 벌써 한시간이나 먼저 나와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집에 도착해서 그동안 쌓였던 이야기며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까지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다가 문득, 어머니의 모습 을 자세히 보니 모습이 너무 변하신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아려왔다. 해가 갈수록 더 왜소해지시고 '할머니'란 호칭을 동네 아이들로부터 거부감없이 받아 들이신 지 오래 되신 어머님 ! 이마의 주름살 깊이 만큼이나 숱한 고난의 순간을 꿋꿋이 헤쳐 오신 어머님의 머리도 이젠 검은머리를 찾아 볼 수 없 을 정도로 하얗게 변하셨다.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즈음, 우연히 지난 추억의 앨범을 뒤지다가 사진 사이에 끼워진 통장 하나를 발견했 다. 깜짝 놀라 열어보니 몇 해 전에 만들어진 내 이름으로 된 적금식 통장이었다. 중사 박 경 석 해군 기록물보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