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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게 이용만 당하다가 끝내는 버림을 받아 청해진에 왔다고 거짓 진술하였다. 이에 장보고는 과거의 잘못은 덮어둔 채 염장의 말을 그대로 믿고서, 술과 함께 회포를 풀려고 하였 다. 그러나 염장을 말을 그대로 믿었던 장보고는 결국 염장 에 의하여 제거되고 말았다. 이와 같이 정년이나 염장과의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장보고는 자신에게 적대적이었던 인 물이라 하더라도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휘하로 들어오면 지난날의 허물을 묻지 않고 그 사람을 능력에 맞게 대우해 주었다. 장보고는 포용력은 자신이 관할하고 있던 청해진의 백성 들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되었고, 청해진의 백성들 역시 장보고를 절대적으로 추종하였다. 장보고를 제거한 신라의 귀족들은 청해진이 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대외무역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감안하여 계속 유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장보고의 부하는 물론이 고 청해진의 백성들까지도 장보고 를 추모하면서 끝까지 저항하자, 급기야 청해진을 포기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백성들을 모두 오늘날의 전라북도 김제 지역으로 강제 이주 시키고서 사태를 마무리지었을 정도였다. 이와 같이 부하를 아끼고 사랑한 장보고의 태도는 청해 진 해상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 ■ 해상왕국을 건설한 강한 추진력 장보고가 해상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국왕의 적극적인 후원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신 라의 조선술과 항해술 분야의 기반이 조성되어 있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조선술과 항해술은 어느 날 갑자기 발전되 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장기적으로 투자하고 관심을 쏟아 야 일정한 수준을 유지할 수 있는 특성을 안고 있다. 신라는 진흥왕대에 중국과의 해상교통로를 확보한 이래, 문무왕의 적극적인 수군 증강에 힘입어 나당전쟁에서의 해 전을 승리로 장식하였고, 대왕암의 전설에서 드러나듯이 국 가의 지도자가 바다를 수호하고 개척하려는 의지를 적극적 으로 피력하였다. 이처럼 역대 국왕들이 바다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인 결과,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동북아시아 최고수 준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은 이웃 나라 일본에 전수되 어 일본의 해상활동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쳤을 뿐 아니 라, 중국과 비교하여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수준 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신라는 활발한 해상활 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그러나 신라도 말기에 접어들면서 정치적 혼란과 함께 바다에 대한 관심과 투자가 소홀해졌 다. 그 결과, 신라의 조선술과 항해술도 이전에 비하여 점차 쇠퇴하였고, 해상활동의 주도권을 상실하여 해적들의 노략 질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지경으로까지 전락하였다. 이렇게 쇠락해진 신라의 해상 능력을 다시 일깨울 수 있었던 요인은 장보고의 강력한 추진력 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국왕으 로부터 받은 군사 일만 명을 수 군과 지상군으로 나누고, 이들을 각기 조련시켜 일사불란하게 움 직이는 강력한 군대로 만드는데 힘을 쏟고 있었다. 그런데 장보 고는 군사훈련 못지않게 중요한 작업이 조선술과 항해술의 수준을 복구해야 하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장보고는 신라인들의 바탕에 남아 있는 조선술과 항해술의 잠재적 능력을 계발하는 데 전력을 기울 였다. 쇠퇴해 가는 조선술과 항해술을 다시 발전시키는 데는 엄청난 노력과 어려움이 반복되는 과정이었다. 청해진 건설 초기에 쏟아 부은 장보고의 열정과 추진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그 결과 장보고는 청해진을 설치한 지 얼마 지나 지 않아 해적을 말끔히 소탕할 수 있었다. 장보고는 원수마저도 포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마음 을 지니고 있었다. 또한 과감하게 도전한 작업에 대해서는 과단성 있고 강력한 추진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넓은 포용력과 강한 추진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 에 장보고는 청해진을 바탕으로 동북아시아의 해상왕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해군/2003. 5~6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