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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두목이 이야기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기는 하였지만, 장보고가 이제 방금 중국에서 돌아온 정년에게, 그것도 자 신과 원수지간이었던 사람에게, 자신의 정치적 생명이 걸 린 중대사를 전적으로 위임하였다는 사실은 보통 사람으로 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보고의 이 같은 포용력에 당나라의 대표적 시인인 흠뻑 반한 것이다. 두목은 당나라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진압한 곽자의(郭 子儀)와 그 친구 이광필(李光弼)의 관계에 견주어 장보고 의 행동을 칭송하였다. 곽자의와 이광필은 원래 같은 부대 의 장수였다. 그런데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나빠서 함께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경우에도 서로 흘겨보면서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안록산의 난이 일어난 뒤 조정에서는 곽자의를 그 부대의 책임자로 임명한 뒤 반란 을 진압하게 하였다. 이전까지 같은 직급의 동료였던 곽자 의가 하루아침에 이광필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책임자 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이에 이광필은 곽자의에게 가서, ‘내 한 몸은 기꺼이 죽 을 것이니 처자나 살려 주시오’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곽 자의가 황급히 마당으로 달려 내려와 이광필의 손을 잡고 다시 마루 위로 올라가서는, ‘지금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이 피난갔는데, 그대가 아니면 반란군을 칠 수가 없소. 어찌 사사로운 원한을 품을 때이겠소’하면서 위로하였다. 마침 내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서로 충의(忠義) 로써 격려하고 전장으로 나아가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고 한다. 두목은 곽자의가 이광필을 감싸안은 것보다도 장보고가 정년을 포용한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결단이었다고 하면서 장보고를 높게 평가하였다. 또한 장보고의‘어질고 의로운 마음[仁義]’ 은 성인(聖人)으로 일 컬어지는 중국의 주공(周公) 이나 소공(召公)도 미처 실천하지 못했다면서 장 보고를 극찬하였다. 장보고의 포용력은 단 순히 당나라 시인을 감동 시킨 데 머무르지 않고, 이 후 청해진을 바탕으로 장보고 가 해상왕으로 등장할 수 있게 한 커다란 원동력이 되었다. ■ 애장사(愛壯士) -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다 원수마저도 감싸 안은 장보고의 포용력은 친구 정년에게 만 베푼 것이 아니었다. 「삼국사기」 에서는 부하에 대한 장 보고의 사랑을‘애장사(愛壯士)’ 라는 한 마디의 말 즉, ‘부 하를 아끼고 사랑하였다는’말로 압축하여 표현하였다. 당 시 신라의 다른 장수와 일반 병사 사이에는 신분적 구별이 너무 확연하여 감히 서로 어울릴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나 평민 출신의 장보고는 그의 화려한 전력과 막강 한 권한에도 불구하고 부하들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였 다. 부하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오늘날의 지휘 관들에게 있어서는 너무도 당연한 상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당시 신라에서 장보고와 같이 부하를 대하는 것 은 그 자체가 의아스럽고 특이한 현상으로 인식되었다. 장보고가 부하들을 아끼고 사랑하는 것에 비례하여 장보 고에 대한 부하들의 충성심이 증대되었고, 동시에 유능한 인재들이 청해진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그 결과 장보고 군 대의 사기와 전투력은 신라 최고의 실력을 자랑하게 되었 다. 장보고 휘하 오천의 군사는 여타 부대의 군사 십만 명 을 궤멸시킬 정도로 막강하였다(839년, 달구벌 전투). 이처 럼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장보고의 태도는 그의 정적들 에 의해 이용되어 자신이 피살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 였다. 장보고를 암살한 염장(閻長)은 원래 장보고와 대립하 는 세력의 편에 가담하였던 인물이었다. 장보고의 영향력 이 커지는 것에 대하여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신라 귀족들 은 장보고를 제거하는 임무를 염장에게 맡겼다. 이에 염장은 거짓으로 청해진에 투항하였다. 염장은 장 보고의 성향을 이용하기 위하여, 마치 자신이 신라 귀족들 해군/2003. 5~6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