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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그 전공을 인정받아 군중소장(軍中小將)이라는 자리에까지 올랐다. 당시 무령군 소장은 휘하에 병력 천여 명을 거느리던 고급 지휘관에 해당하였다. 이와 같은 장보 고의 출세 소식은 당나라에 살고 있던 많은 신라인들에게 급속히 퍼져 나갔다. 그 결과, 산동반도 일대의 신라인들 은 자연스럽게 장보고 주위에 몰려들 었고, 장보고는 재당신라인들의 중심 인물로 부상하였다. 또한, 당시 산동반 도 일대 신라인들에게 정신적 구심처 를 제공하였던 사찰이 적산포의 법화 원이었다. 그런데 이 적산 법화원을 창 건한 사람이 바로 장보고였다. 즉, 장 보고가 재당 신라인 사회에서 차지하 고 있던 비중이 막대하였음을 짐작하 게 해 준다. 이처럼 중국에서 화려하게 활동한 장보고는 해적을 소탕하기 위하여 다 시 신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당나라 해적들의 노략질은 신라의 큰 골칫거 리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조정은 국정 통제력이 상당 부분 와해되었기 때문 에 해적들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한 채 속수무책 당할 수밖 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장보고가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귀국하자 국왕이 반색을 하며 궁궐로 불러들 여 대면하였던 것이다. 신라 국왕의 입장에서 볼 때 장보고 는 이미 능력을 검증 받은 인물이었다. 국왕은 당나라를 오가는 신라 사신들을 통하여, 장보고 가 무령군에서 쌓은 눈부신 활약상은 물론이고, 재당신라 인 사회를 주도하고 있던 것까지 낱낱이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처럼 뛰어난 능력을 가진 장보고가 국가적 우환 인 해적들의 노략질을 소탕하겠다고 귀국하였으니 국왕으 로서는 너무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때문에 흥덕왕 은 장보고를 청해진의 책임자인 대사(大使)에 임명하고 군 사 1만 명을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장보고는 자신이 호언한 바와 같이,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신라 해안에 출몰하던 해적들을 말끔히 소탕하 여 동북아시아 해상을 호령하는 해상왕으로 부상할 수 있 었다. ■ 원수를 감싸안은 장보고의 포용력 당나라 말기의 대표적 시인인 두목(杜牧, 803-852)은 그 유명한 두보(杜甫)와 비교하여‘소두(小杜)’ 로 불릴 정 도로 명성을 떨쳤던 사람이다. 그의 한시(漢詩)는 조선시 대 유학자들에 의하여 널리 애송되었 고, 일부는 오늘날 우리나라 중·고등 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다. 그런 데 이처럼 유명한 시인이자 문학가인 두목이 자신의 문집인 번천집(樊川集) 에서 장보고의 사람됨을 극찬하였다는 사실이 매우 이채롭다. 두목의 문집에 따르면, 장보고와 정 년은 원래 절친한 친구로서 함께 중국 으로 건너가 무령군에서 나란히 성공 하여 둘 다 군중소장의 자리에 올랐다 고 한다. 그런데 두 사람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등을 돌리 고 원수처럼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그 러던 중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해적 을 소탕하고 청해진을 운영하는 등 활 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반면에, 정년은 관직에서 쫓겨나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하였다. 그러던 중, 정년은 중국인 친구에게‘신라로 돌아가 장 보고에게 걸식하려고 한다’ 고 토로하였다. 이에 중국인 친 구는‘그대와 장보고 사이가 어떠한 상태인지 뻔히 알면서 어찌하여 장보고의 손에 죽으려고 하는가’하면서 적극 만 류하였지만,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느니 차라리 고향에 가 서 죽겠다’ 는 정년의 마음을 되돌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신 라로 돌아온 정년은 청해진에 있는 장보고에게 찾아가 자 신에 대한 처분을 일임하였다. 이에 장보고는 자신에게 등 을 돌렸던 정년을 원수가 아닌 반가운 옛 친구로서 맞이하 고 술을 대접하며 극진히 환대하였다. 그런데 술자리가 끝 나기도 전에 국왕이 시해되어 나라가 어지럽고 임금자리가 비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장보고는 눈물을 흘리면 서 친구 정년의 손을 붙잡고, ‘그대가 아니면 반역자를 죽 이고 환란을 평정할 수 없다’ 며 자신의 군사 오천 명을 거 느리고 경주로 진격하게 하였다. 해군/2003. 5~6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