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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 별 기 고 서기 828년 4월, 신라 조정에서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희한한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 다. 전라도 바닷가에서 태어난 미천한 신분 출신의 한 남자가 국왕(흥덕왕)과 직접 대면 하는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국왕이 자신의 백성과 대면하는 것이 무슨 진풍경이라도 되 느냐고 반문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고려, 조선시대와 달리 신라시대에 지방 출신의 백성 이 국왕과 직접 마주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사건이었다. 더욱이 지방 출신의 이 사 내가, 그것도 국왕의 면전에서, 국왕도 해결하지 못하던‘해적소탕’ 을 자신이 하겠다고 큰 소리치면서 군사 1만 명을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더 의아스러운 것은 이 같 은 제안을 들은 국왕이 쌍수를 들고 적극 환영하여 곧바로 군사 1만 명을 내주고 동시에 이 사내, 즉 장보고(張保皐)를 해적소탕의 사령부인 청해진의 책임자로 임명한 것이다. ■ 미천한 바닷가 출신 소년이 해상을 호령하다. 요즘에도 지방대 출신자나 지방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서울이나 수도권 사람들에 비 하여 취직이나 문화적 혜택 면에서 상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고 하소연한다. 그러 나 이 같은 하소연도 신라시대와 비교하면 사치스러운 불평에 불과할 정도이다. 신라시 대의 지방민은 왕경에 거주하는 사람과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차별을 받는 존재였다. 지방 출신자가 중앙 벼슬길에 진출하는 것은 원천적으로 봉쇄되었고, 지방 거주자가 수 도인 경주로 이주하는 것마저도 불가능하였다. 특히, 험한 일을 해야 하는 바닷가 출신 자들은 일반 농민보다도 더 천대받는 계층이었다. 따라서 바닷가 출신의 장보고가 청해진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로도 신라 역사상 획기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장보고가 신라로 돌아와 해적소탕의 중책을 맡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나라에서의 활약과 성공이 크게 작용하였다. 해안가의 미천한 소년에 불과하였던 장보고는 스무 살 무렵 친구 정년과 함께 무작정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런데 당시 당나라에서는 지방의 반 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국적을 불문하고 능력있는 인재를 모집하고 있었다. 따라서 활쏘기 말타기와 같은 무예에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던 장보고와 정년은 진압군의 선봉 부대인 무령군(武寧軍)에 들어가 활동할 수 있었다. 무령군에서 마음껏 능력을 발휘한 포용력과 추진력을 겸비한 인물, 장보고 - 장보고의 리더십- 고 경 석 충무공수련원 장보고대사 연구원 장보고를 생각한다 해군/2003. 5~6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