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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적진에서 무장독립전쟁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73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은 일본군과의 단독전투와 중 국군과의 연합전투를 통해 항일무장독립투쟁사에 크게 공헌 하였다. 특히 1929년 7월 유하현 추가보 전투와 1932년 1월 양 기하 부대의 혈투 등은 대단하였다. 그리고 1932년 4월에서 7 월에 걸친 무찌른 대승첩이었다. 총사령관 양세봉은 병력 1만여 명, 중국의용군 총사령 이춘윤의 병력 2 만여 명과 연합 전선을 펴서 일본·만 주연합군에 크게 승리했다. 4월 첫전 투에서 일본군 80여 명의 사상자를 내 었으며, 5월과 7월에는 공군의 지원까 지 받은 일본군 대부대와 영릉가에서 접전하였는데, 당시 일본군에선 1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 장군 순국 (요녕성 신빈현 향수하자향 소황구촌) 흥경성 전투 유적지 조선혁명군 하로하 전투 유적지 (요녕성 관전현 하로하 사도구) 일본군 밀정으로 변절한 동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양세봉 장군의 묘 (서울 국립현충원) ▶ 조선혁명군의 항일무장독립투쟁의 의의 조선혁명군은 만주지방에서 독자적 조직을 유 지하며 활약한 최후의 민족주의계열 독립군이었 다. 특히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비슷한 사례를 찾아 보기 힘들 정도로 10여 년간 고군분투하며 치열하 게 일제와 항전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조선혁명군의 독립전쟁은 1910∼1930년대 남만 주 독립투쟁의 총결산이었다. 또한 한중 연합작전 을 통해 적지 않은 일·만군을 살상하고 만주 및 식민지 통치를 교란함으로써 강대한 일본 군경과 만주국 관헌 등의 활동 반경을 확대하지 못하게 만 들었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점령 이후 크게 증 강된 일본군의 대부대를 상대로 적진 한가운데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점에서 무장독립투쟁사 에서 가장 위대한 항전으로 평가되며, 역사적 의의 가 매우 크다고 평가할 수 있다. 조선혁명군 흥경성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