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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북로군정서 총재이며 청산리 대첩의 총지휘자였던 백포(白圃) 서일(徐一)은 청산리 전투가 끝난 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보고서에 청산리 항일독립전쟁의 승리의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모든 병사가 생명을 불고하고 분용결투(奮勇決鬪)하는 독립에 대한 정신이 먼저 적의 지기(志氣 )를 압도함이요,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로 사격성능(射擊性能)을 극도 발휘함이요, 임기수 변 (臨機隨變)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意表)에 출(出)함이라.” 우리가 항일독립전쟁의 역사를 기억하 지 않는다면 독립항쟁의 고귀한 정신을 어떻 게 계승할 것이며, 우리민족의 미래, 강성한 조국의 미래를 만드는 지혜를 어디서 찾을 것인가. 청산리 독립전쟁의 역사적 의미는 독립 전쟁에 목숨을 바치기로 결심한 독립군 병 사들의 영웅적 헌신과 결전의지, 북간도 지 형을 철저히 파악하고 전술에 이용한 독립 군 지도자들의 우수한 작전지휘가 승리를 거두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북간도지역, 특히 청산리 독 립전쟁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들의 헌신적 지원과 성원이 있었기에 청산리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자주독립의 갈망이 용솟음치는 독립군 장병들과 북간도 한인들의 혼연일체가 된 힘은 청산리 독립전쟁의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하다.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연합부대가 청산리전투에 서 크게 승리하자,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 전역에 걸쳐 강 력한 보복전을 전개하였는데 아무 죄도 없는 한인촌들을 습격하여 살인, 방화, 약탈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경신참변의 비극이 북간도 전역에서 벌어진 것이다. 각처에 산재한 독립군은 이를 피하여 소만(蘇滿) 국경지 대 밀산으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모인 독립군부대는 북 로군정서 · 서로군정서 · 대한독립군 · 간도국민회 · 대한 신민회 · 의군부 · 혈성단 · 광복단 · 도독부 · 대한정의군 정사 등 10개 단체였다. 독립군 수뇌부는 각 단체를 통합하기로 의견을 모아 각 군단 수령회의 의논 결과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총재에 서일(徐一), 부총재에 김좌진 · 홍범도 · 조성환, 총사령에 김규식, 참모총장에 이장녕, 여단장에 지청천을 임명하고 행동통일을 결의하였으며, 병력은 27 소대 3,500명이었다. 청산리 전투 기념사진(길림성 안도현) 흑룡강성 밀산현 당벽진 한흥동 봉밀산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