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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일본군의 북간도 침입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에서 완패한 일본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대한독립군 부대를 일거에 소탕하 려 하였다. 만주 북간도 지역에서 나날이 강대해지고 군사력 이 증강되어 가고 있는 독립군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일제는 만주로 병력을 출병할 수 있는 구실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인 마적단(馬賊團)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훈춘(琿 春)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을 공격하게 하였다. 일본군과 조선 총독부가 마적을 동원하여 꾸민 사건으로 일본의 교활한 음모 를 여실히 보여준 훈춘사건(琿春事件)이다. ▶ 일본군의 간계, 훈춘사건과 독립군 이동 훈춘사건을 기화로 일본군은 만주에 있는 일본인과 공관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붙여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로 출병했다. 일본군은 제19사단, 제20사단과 제13사단 및 제14사단의 일부 병력과 관동군으로서 총 3만여 명의 정규군 전투병력이었다. 북간도 일대로 침입한 일본군은 동서남북 사면으로 독립군 을 포위하고 대규모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의 북간도 침입 정보를 입수한 서로군정서 김동삼과 북로군정서 김좌진은 중국당국의 권유를 받아들여 오랫동안 주둔하고 훈련했던 왕청근거지 를 떠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백두산 일대로 진 군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로군정서는 서간도를 떠나 백두산 지역 내두산 ( 奶 頭山)에 진지를 구축하기 위하여 유하현 삼원포, 합니하, 고산자 등지를 떠나 백두산으로 향하고, 북 로군정서는 왕청현 서대파 태평촌 사관연성소 졸업 식을 마치고 백두산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북로군정서 훈련지 및 주둔지(길림성 왕청현) 훈춘 사건 유적지(현재 훈춘시 공안국) 산리 대첩 기념비(길림성 화룡시 청산리촌 2002년 건립) 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유적지(왕청현 태평촌) 청산리 일대 6일간의 독립전쟁 청산리 대첩은 서일(徐一)과 김좌진(金佐鎭)이 지휘하는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북로군정서)와 홍범도(洪範圖), 안무(安 武) 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등의 독립군 연합부대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화룡현 청산리 백운평 (白 雲坪),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고동하 등지에서 일본군 19사단 보병연대와 6일 동안 십여 차례 전개한 치열한 전 투 이다. 항일독립전쟁사에서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200여 명을 사살하고 대승을 거둔 최대의 승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