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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산남의진의 입암, 흥해 전투 1907년 8월 26일(양력 10월 3일) 산남의병대장 정용기는 우재룡, 이세 기 등과 관동으로 북상하여 서울진 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본진 선발 대 100여 명을 거느리고 영일군 죽장 면 매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일 본군 청송수비대가 입암리로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정용기는 우재룡, 김일언, 이세기 세 부장을 각기 길목에 매복시키고, 자신의 본대는 9월 1일 새벽에 입암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과 새벽까지 전투 를 치렀다. 1907년 9월 1일 밤 9시 30분경부터 9월 2일 새벽 2시경까지 벌어진 입암전투에서 정용기 대장을 비롯 한 이한구, 권규섭 등 19명의 장령들이 전사하였다. 정용기의 아버지 정환직이 달려와 남은 의진을 수습하 고 10월 29일 의병을 이끌고 흥해를 습격하여 우편국 분파소등을 불태우고 취급소장 등 3명을 사살하였 다. 11월에는 신녕, 의흥, 흥해, 영덕을 습격하여 적병 20여 명을 베어 죽였다. 경주로 이동할 때 일본군에 게 포위 당하자 이튿날 부하들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동대산에서 일본군에 항쟁하려다 12월 11일 새벽 고 천 에서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영천 금호강변에서 일본군에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산남의진 전투유적지(포항시죽장면 입암리 매현리 일대) 산남의진 기념비, 충혼비 정환직 의병장 순국지(경북 영천시조양각 일대 금호강변) ▶ 봉화 서벽과 내성 전투 서벽전투는 1908년 5월 17일 새벽 4시에 시 작되었다. 영천수비대는 봉화 오록에서 주실 령을 넘어 두내리(斗內里)를 경유해 서벽리로 들어가려 하였고, 이강년 의병부대는 서벽리 동쪽의 골짜기 입구에서 영천수비대를 포위 하여 공격하였다. 4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나머지는 주 실령을 넘어 내성으로 퇴각하였다. 봉화내성 관아전투는 1907년 8월 30일 새벽 삼척에 주둔하고 있던 민긍호 의병부대는 봉화를 습격하여 헌병파견분파소와 주요 건물을 불태웠다. 이어 11월 10일, 민긍호 의병진 중군장으로 활약하던 변학기가 의병 400여 명을 이끌고 삼척에서 와서 다시 봉화읍을 공격하였다. 경북 봉화 서벽 전투지 및 봉화 내성 봉성리 전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