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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봉기와 국권수호전쟁┃15 ▶ 진주관찰부는 의병의 해방구 1896년 2월 28일, 대구부로 피신했던 경무관 김세 진이 대구 관찰사 이중하에게 대병력을 지원받아 진 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관군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이 때 선봉장 서재기와 오종근이 500여 명의 별동대를 거 느리고 100여리 밖 의령으로 달려가 정암진 고개에서 관군들을 격퇴하였다. 이것이 진주의병의 두 번째 승 전이었다. 3월 19일, 관찰사 조동필이 진주성을 탈환하고자 관 군을 이끌고 진주로 왔다. 그러나 의병의 기세가 높고 결전의지가 강함을 깨닫고 함부로 진주성 공격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의병진이 야간에 기습을 해서 관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관찰사 조동필은 급히 대구로 도망을 갔 고, 의병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노응규 · 정한용 의병장이 의병을 일으킨지 1개월도 안 돼 진주관찰부 관할 22군을 의병천하로 만들 고, 승전을 거듭하며 민생안정을 도모하는 동안 경상도 각지 여러 고을에서 진주의병에 가담하는 장정들 이 늘어나 1만여 명을 넘어섰다. ▶ 10여명 의병, 진주관찰부 점령하다. 1896년 2월 19일, 경상도 안의에서 노응규, 최두원, 서재기, 정도현, 박준필, 최두연 등의 지사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곧바로 경상남도 의 행정 중심지이자 요충지인 진주로 진격해 진주성을 점령했다. 내 · 외성이 견고하여 난 공불락이던 진주성을 백칠십여리나 떨어진 함양군 안의의 의병들이 하루 만에 점령한 것 이다. 노응규가 이끈 의진은 임경희, 서재기 등 수십 명에 불과한 의병으로 진주성을 장악했 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게 가능했던 것은 진주향교 장의였던 한진완 등 유림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진주성을 점령한 노응규는 성안을 지키고, 정한용이 성밖을 지켰다. 인근 고을의 친일매국노를 단죄하 는 한편, 성안에 초빙부를 설치하고 명망있는 지역인물들을 대거 영입하는 행정제도를 도입하여 공무를 평상시와 다름없이 진행하였다. 조선말기 극심한 부정부패와 관리들의 횡포에 대한 민중들의 반발이 의병들의 진주관찰부 점령을 적 극적으로 지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무능을 격파하고, 매관매직, 조세부패 척결 등 을 바라는 민심의 결과였다. 진주성 전투 유적지(경남 진주시 진주성) 진주성 의병 전투지 성벽과 남강 진주성 의병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