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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독립전쟁 50년의 거룩한 울림 ▶ 을미의병의 격전지 남한산성 이천수창의소는 1896년 1월 17일 광주군 백현에서 서 울 용산에서 파견된 일본군 수비대 180여 명과의 전투 끝에 승리해 많은 전리품을 노획했다. 이어 2월 12일 이 현에서 재차 투입된 일본군 200여 명과 전투를 벌인 후 이천으로 재집결했다. 여주의 군사 500여 명을 모집해 2 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2월 28일 남한산성으로 진입 했다. 남한산성에는 이미 광주의진, 양근의진도 합세해 진 을 치고 있었다. 남한산성 내의 의병 수는 약 1천 600명 에 이르렀고, 이 중 600명이 광주의 농민이었다. 남한산 성에는 군수물자도 풍부해 군량과 무기들이 산더미 같 이 쌓여 있었고, 이곳에 비축한 군량미는 5만여 석에 달 할 정도였다. 관군은 곧 친위대와 강화병을 파견해 남한산성을 포위 했다. 남문 밖에 지휘소를 설치해 1개 중대를 배치하고, 동문 밖 불당곡과 향교리에 각 1개 중대, 서문 밖 석회당 에 각 1개 소대를 분산 배치해 보급로를 차단하며 공격 을 준비했다. 관군은 3월 5일 공격을 벌였으나 오히려 크게 패하고 말았다. 관군은 일본군과 함께 재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험난한 지형과 성벽을 이용한 의병의 강렬 한 반격으로 패전을 거듭했다 . ▶ 한양으로 진격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으라. 남한산성 연합의진은 서울진공작전을 성공하여 러시 아공사관에 있는 고종의 환궁과 친일내각을 처단하고, 일본을 배척하려는 것이었다. 첫째는 의병진이 수원을 점령하고, 2차 협공으로 산성 주변 일본군을 타파하고, 3차로 충청 · 전라 · 경상도 지방 의병까지 규합해 서울 로 진공하겠다는 목표였다. 그러나 이 진공작전은 수포 로 돌아갔다. 1896년 3월 22일 관군에 매수된 후군장 박 준영과 좌군장 김귀성이 성문을 열어주고 관군을 끌어 들인 것이다. 새벽 2시, 일본군과 관군 연합부대의 남한 산성 협공이 시작됐고, 전투는 날이 밝을 때까지 치열하 게 전개됐다. 당시의 전투로 사망자가 의병 500여 명, 관 군 300명이었으니,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말해준 다. 성을 빠져나간 의병은 곤지암을 지나 도척 장항장터 에서 추격하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고, 관군의 공세를 피해 남하를 결정하고 제천으로 향했다. 남한산성 전투유적지(남한산성 동문)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모습(경기도 성남시) 남한산성의병 전투지(동쪽 성벽의 모습) 남한산성 의병 전투지(경기도 광주시 도척면 노곡리 장항장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