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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봉기와 국권수호전쟁┃13 명성황후 살해 현장(경복궁 내 건청궁) 옥호루 명성황후 살해 현장(경복궁 옥호루의 현재 모습) ▶ 고종의 외교정책 실패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중국으로부터 빼앗은 요동반도를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삼국간섭에 의해 반환하는 모습을 본 후, 고종과 명성황후는 외교노선을 수정하였다. 강대국 러시아의 적극적 개입을 통 해 일본을 배척하는 반일정책을 수립한 것이다. 그러던 시점에 친일 내각의 핵심 세력이었던 내무대 신 박영효가 고종과 명성황후를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다가 발각되자, 고종과 명성황후의 반일, 친러 정 책 은 더욱 강력히 추진되었다. 이러한 친러시아 정책을 지켜보던 일본정부와 주한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외교적 접근으로는 이 러 한 추세를 타개할 수 없음을 판단하고 은밀하게 명성황후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리고 일본 정 부 차원에서 준비하고, 미우라 고로, 류노스케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여 명성황후를 무참하게 살해 한 것이다. ▶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다. 을미사변, 백여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일본정부는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무관하다는 철면피한 주장 을 반복하고 있다. 그들이 주장하는 대로 대원군의 요청에 의해 미우라가 응했다는 주장도 어불성설이거 니와 조선훈련대의 거사를 일본군이 지원해 주었다는 논리도 터무니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을 대표하는 공사가 정부의 지시도 없이 그와 같은 잔혹한 범죄를 독단적으로 계획하고 자 행하였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반복적인 역사왜곡과 망언, 변하지 않는 기망(欺罔)의 습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을미사변’이란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 을미의병의 봉기와 이천수창의소 결성 을미의병은 1895년 10월 명성황후 살해사건과 단발령 이 도화선이 되어 충청도의 제천과 유성에서 유인석, 문 석봉 등이 중심이 되어 처음으로 봉기하였다. 특히 친일 내각이 전국에 내린 단발령은 전국적으로 반일감정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어 전국에서 의병들이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경기도 지역 의병은 단발령 공포 다음 날인 1895년 12 월 31일 김하락, 구연영, 신용희, 김태원, 조성학 등 젊은 유생들이 중심이 되어 이천에서 봉기하였다. 이천수창의군 전투 유적지 (경기 이천시 신둔면 수광리 넋고개) 남한산성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