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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열일기 • 석주 이상룡의 서사록 ④ 95 나 함께 갔던 사람들을 놓쳐버리고 중도 낭패하여 더 욱 사람을 놀라고 염려하게 한다. 젊은 사람의 처사 가 어찌 그리 세밀하지 못하단 말인가? 이상에서 1911년 2월 8일부터 같은 달 21일 까지 2주간에 걸친 석주의 「망명일기」를 읽어보았다. 내용 속에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된 양기탁, 청산 리전투에 참전했던 이장녕 등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 다. 그리고 생이별한 이상동과 이봉희 등 두 아우와 조카들에 대한 애틋함이 들어 있다. 또한 임경업 장 군에 대한 기록을 통해 석주의 해박하면서도 개방된 역사관을 짐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는 그 무엇보다도 이 짧은 기간의 일기 속에서 독특한 그의 ‘언어관’과 ‘국가관’을 주목하였 다. 석주는 국어는 ‘국민의 마음의 소리’라는 점을 주 목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종족이 다른 사람이 라도 국어를 함께 사용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문 득 정신이 바뀌고 혼연히 하나의 국민이 된’다는 점 을 강조하고 있었다. 그가 언어를 이렇게 중시한 이유는 바로 당시 조국 의 ‘모든 학교가 어학을 주요 과정으로 하’면서 ‘공문 과 사사로운 편지까지도 모두 국문의 사용을 금 하고 순전히 일본글을 쓰도록 하고’ 있으므로 ‘고향으로 다 시 돌아가는 날 장차 한 사람의 한인도 볼 수 없을 것’ 이 염려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으로 석주가 자신의 처남인 김대락과의 조국 이 망한 원인을 논한 것을 살펴보자. 조국이 망한 원 인을 말하는 김대락에게 석주는 독립의 방도를 말하 고 있었다. 여기서 석주는 국가의 흥망성쇠를 인간의 생노병사와 연관시켜 설명을 하고 있었다. 석주는 국가의 원기인 민심이 이미 흩어져버린 상 태에서 이 민심을 다시 하나로 모으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이러한 석주의 사고는 이후 그의 독립운동노선으로 연결된다. 사분오열된 독립 사회를 하나로 합치려는 시도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러한 내용과는 별개로 석주가 유하현에 들어가 살 집을 구하라는 일을 수행하지 못한 채 돌아온 장 자 이준형 등에게 콜롬버스의 예를 들어 훈계한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석주는 어쩌면 자신들의 독립운동을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그 모험 정신과 연결시 켰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석주의 「망명일 기」는 다음 호로 이어진다.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다. 고려대에서 경제학 · 정치학을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학과에서 율곡 연구로 석사 ·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선 임연구원을 지냈고, 현재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 감사를 맡고 있다.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풀어낼 지혜를 지나간 역사에서 찾아내고자 노력하고 있다. 면암 최 익현 선생의 5대손이다. 필자 최진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