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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독립운동가 • 오덕홍 ·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 69 동하였다. 11월 16일에는 흥해를 공격하게 하여 분 파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한국인 순검 1명씩 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일본군과 지속적 전투과정에서 주요 의 병장이 전사하거나 무기와 탄약을 보충하기 힘든 상황에서 산남의진의 전력은 점점 약화되었다. 일 본군의 포위망도 계속 좁혀져 왔다. 이 때 13도창 의군 연합의병부대가 서울진공작전을 계획하자 북 상을 추진하여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각자 상인 또 는 농부로 변장하여 관동지역으로 집결하기로 했 다. 그런데 정환직 의병장이 영일군 흥해면 마산리 에 머물다가 일본군 수비대의 정보망에 발각되었 다. 결국 정환직은 1907년 12월 11일 죽장면 고천 (高川)에서 일본군 영천수비대에 잡혀 대구로 압송 되던 중 12월 20일 영천에서 순국하였다. 정환직 의병장의 순국으로 관동 집결도 무산되었다. 정환직이 순국한 이후 최세윤이 새롭게 산남의 진 총대장으로 추대되었고, 산남의진도 재정비되 었다. 재정비된 산남의진에서 정래의는 참모장에, 김일언은 도포장에 임명되었다. 정래의와 김일언 은 최세윤 의병장을 보필하면서 경상도 일대에서 장기전을 펼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남동대 산을 근거지로 하고 부대를 소규모 유격대로 나눠 보현산, 팔공산, 주왕산, 철령, 주사산 등지에서 유 격전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최세윤 또한 1908년 8 월 장기 용동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이세기와 서종 락 · 김사곡 등이 전사, 체포되면서 산남의진은 와해 되고 말았다. 김일언의 의병활동도 산남의진과 운 명을 같이하였다. 김일언은 2010년에 건국훈장 애 족장을 추서받았다. 의병 출신 규합 ‘참동계’ 조직, 재기 도모하기도 한편, 정래의 역시 산남의진이 해산되면서 의병 투쟁을 멈추었지만,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 계(參同契)’를 조직하여 의병으로 다시 활동하고자 했다. 정래의는 조성목, 정순기, 정호용 등과 은밀 히 모임을 갖고 산남의진의 재건과 의병을 잇는 구 국항일운동을 모색했다. 이를 위해 순국의병추모 사업 등을 위한 단체로 위장한 참동계를 조직하였 다. 참동계는 흥해, 영천 등 영남일대에 취지를 알 리고 동지를 규합하는 등 구체적 활동을 시작하였 다. 하지만 밀정의 밀고로 발각되고 말았다. 정래의 는 1919년 제령(制令) 제7호 위반으로 체포되었다. 조선총독부 경찰의 자백 강요와 심한 고문 등을 겪 었지만 체포 직전에 주요 서류 등을 소각하여 경찰 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결국 1927년 10월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정래의 의병장은 2022 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