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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2023년 6월 순국 PEOPLE  아름다운 사람들 6월의 독립운동가 병장이 재기한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여 우 포장(右砲將)에 선임되어 활동했다. 정용기 의병장 이 순국한 이후 총대장직을 이어받은 정환직 의병 장, 최세윤 의병장 휘하에서도 활동하였다. 최세윤 휘하에서는 도포군(都砲軍)으로 활동했다. 정래의 의병장도 정용기 의병장이 재기한 산남 의진의 우익장, 좌익장, 참모장으로 경상북도 흥해· 영해·청하군 등지에서 활동했다. 이후 1926년 3월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 叅 同契)를 조직했 다가 경찰에 체포되었다. 김일언 · 정래의 의병장이 참여하여 활약한 산남 의진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황제의 측근으로 시종관이었던 정환직(鄭煥直)이 고종의 밀지를 받아 대규모 의병봉기를 계획한 데서 출발 한다. 정환직은 1905년 12월 관직을 사임하고 중 국 상하이에서 신식무기를 구입하는 한편, 아들 정 용기를 불러 뜻을 전하고, 군자금으로 하사금 5만 냥과 전 참찬 허위(許蔿)로부터 관직에서 물러난 동료들의 모금액 2만 냥을 확보하였다. 그리하여 1906년 3월 정용기·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이 영천에서 의병을 일으키고, 같 은 해 3월 29일 정용기를 총대장으로 하는 산남의 진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1906년 4월 28일, 흥해군 우각(牛角, 포항시 북구 신광면)을 지나던 중, 경주 진위대에서 ‘정환직이 서울에서 구속되었으니 협상 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이에 정용기는 중군장 이한 구에게 모든 지휘권을 위임하고 경주진위대로 갔 다가 속아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후 산남의진은 이 한구 의병장을 중심으로 영천, 강구, 청하 등지에서 활동하다가 7월 하순 해산되었다. 그러나 1906년 9월 석방된 정용기 의병장은 1907년 봄이 되면서 산남의진을 다시 일으킬 준비 를 했다. 이후 4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의병 모집 을 시작하여 4월 중순에 산남의진을 다시 결성했 다. 제2차 산남의병 총대장에 정용기 의병장을 추 대하고 김일언은 우포장에 임명되었다. 정래의는 우익장에 임명되어 산남의진 활동을 시작했다. 산남의진이 본격적 활동을 전개한 것은 1907년 7월 경이었다. 산남의진은 본진 약 300명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죽장에서 천령(泉嶺, 함양군)를 넘고, 1대는 신광에서 여령(麗嶺)을 넘어 7월 17일 청하 읍(포항시 청하면)을 공격하였다. 청하읍내로 입성 하여 창고의 무기 등을 몰수하고 분파소 등을 파괴 한 뒤 일제 침략에 협조하던 한인 순사 1명을 처단 했다. 청하를 장악한 뒤 천령으로 돌아왔는데, 일본군 대부대가 포항으로 들어왔다는 보고를 받고 일본 군을 상대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하여 죽장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무기와 탄약의 부족으로 북상 은 지연되었다. 이 무렵 대구진위대 참교 출신 우재 룡(禹在龍)이 의병부대에 가담하여 함께 의병전쟁 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07년 8월 14일 청송 신성(薪城)에 도착 한 후 신돌석 의병부대로부터 일본군이 활동하고 있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 였다. 마침내 일본군 보병 제14연대 제12중대의 1 개 소대 병력 약 30명이 신성지역으로 들어오자 밤 새도록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그 결과 일본군은 8 월 15일 새벽 현동 추강(秋江) 뒷산으로 패주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