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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순국선열 • 민종식 의병장 51 전투 경험이 많은 병사들이었다. 이들은 다 나카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조 양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의 숲 속에 잠복 하였으며, 31일 새벽 2시 반 기마병 폭발반 이 동문을 폭파했다. 이를 신호로 일본 보병 과 헌병대, 경찰대가 기관총을 쏘며 성문 안 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 항하였다. 그러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의 성 안 침투를 허용하였다. 결국 치열한 시가 전을 감행하면서 분투했지만, 일본군의 화력 에 밀려 의병 측에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말 았다. 일본 경찰 보고에 따르면, 불과 1시간도 안된 4시경에 일본군이 홍주성을 점령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 측은 10여 명의 사망 자를 낸 반면, 의병 측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 와 운량관 성재평,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다수가 희생되었다. 학살된 양민의 수를 합하면 300여명에 이른다. 여기에 체포 된 의병은 145명으로 보고되었다. 그 중에 김상덕 등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홍주성전투에서 패퇴한 후 민종식은 간신 히 성을 빠져나와 예산의 한곡(지금의 대술 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일본 경찰 취조에도 당당한 태도. 교수형 받 았으나 순종 즉위 특사로 석방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 일본 경찰대에 체포된 후 공주부로 압송되었다. 다시 서울 로 압송된 그는 12월 7일과 25일에 모두 4차 례의 심문을 받았다. 이때 그를 심문한 일본 경찰이 “완고하고 과묵하고 침착한 태도로 진술하면서도 타인에 누를 끼치는 것을 피하 였다”라고 하여 의연하고 책임있는 태도를 취했음을 알 수 있다. 1907년 7월 3일 결국 교수형을 선고받았 다. 하지만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 으로 감형한 후 진도 유배형에 처했다. 진도 에서 유배 생활을 한지 5개월 뒤인 1907년 12월 순종이 즉위 후 특사로 석방되었다. 1917년 6월 26일 56세를 일기로 정산에서 병 사 하 였다. 조 선 총 독 부 에 서 “폭도대 장”이라 하여 선 영에 묻 히는 것 을 허락하지 않아 3 개월 만에야 여주군 강천면 가야리의 선 영에 묻혔다고 한 다. 대한민국 정부 는 1962년 건국훈 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다. 민종식 판결문 민종식 유허비(충남 청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