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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2023년 6월 Special Theme  ‘의병의 날’ 13주년 기념 특집 한말 의병전쟁을 다시 본다 (蔡應彦) 의병부대이다. 채응언은 을사늑약과 정미7 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의병을 일으키려했다. 하지만 명망이나 경제력 부족으로 실시하지 못하고 1907년 7월경 유인석 계열 의병부대에 투신했다. 처음엔 잡 역에서 시작해 소모장이 되었고, 이후 시기가 명확 하지 않지만 1908년 봄을 전후한 시기에 독립하여 의병 부대를 결성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의 한국 강점 이후 의병활동이 위축된 상황에 서도 채응언 의병부대는 의병항쟁을 계속하며 국권 회복을 추구하면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활동 지역은 평안남도는 물론, 강원도 · 황 해도 등을 망라했다. 1913년 6월에 황해도 곡산군의 대동리 헌병분견소를 공격하였다. 이에 일제는 채응 언에게 현상금까지 걸고 체포하고자 노력했다. 결국 1915년 7월 5일 채응언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평남 성천의 부호를 찾아갔다가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면 서 의병항쟁이 끝나고 말았다. 이같은 의병들의 적극적인 활동에 대해 일제는 군사적 공격과 사회적 고립화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의병을 탄압하였다. 그 중 한가지가 사법제도의 활 용이었다. 일제는 한국의 사법권을 장악하고 행사 하면서 후기의병들에게 내란, 강도, 살인, 방화, 폭 동 등 다양한 법리를 의병판결에 적용하였다. 일제 는 의병들을 처벌하기 위해 주로 『형법대전』 제195 조 내란죄, 제593조 강도죄, 제677조 폭동죄 등을 적용하였다. 의병들에게는 다양한 법리가 적용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추이를 살펴보면 내란죄의 비중은 점점 줄 어들고 상대적으로 강도와 폭동의 비중은 점차 증가 하는 양상이 나타난 것으로 판단된다. 의병은 정치 의병탄압의 주역 헌병사령관 아카시 모토지로(明石 元二郞) 1915년 성천군 영천면 처인리에서 체포된 최후의 의병장  채응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