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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후기의병기 의병들의 국권수호 항쟁과 일제의 사법탄압 37 영남과 호남에서 의병 항쟁을 벌이던 신돌석과 문태 서의 부대는 양주에 도착하지 못하였음에도 규모는 약 10,000명이고, 양총을 가진 포수는 약 3,000명으 로 구성되었다. 13도 창의군의 지휘부는 먼저 서울로 진격하여 일 제의 한국통감부를 점령하고 외교적 담판을 벌이고 자 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국에 주재중인 각국 공사 의 외교적 지원을 받고자 했다. 이같은 지원을 발판 으로 국제법상 유리한 입장에서 국권회복 문제를 놓 고 통감부와 담판을 짓고자 한 것이다. 또한 서울 진 공작전을 통해 통감부에 타격을 주는 것은 물론 일 본과 맺은 각종 조약을 폐기하고 친일 정부를 축출 하고자 했다. 서울로 진격한 허위의 선발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인 1908년 1월 15일 경 일본군의 선제공격을 받 고 장시간 전투를 벌였지만, 결국 후퇴하였다. 선발 대의 후퇴로 13도 창의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일본 군과의 교전에서 탄약도 거의 소진하였다. 게다가 1908년 1월 총대장 이인영은 부친상을 당하자 의병 부대를 군사장 허위에게 맡기고 문경으로 내려갔다. 이인영은 귀향하면서 “의(義)를 중지하라”는 통문을 각 진에 보냈고 결국 의진을 해산하였다. 결과적으 로 연합의진을 결성하여 서울을 공격하고 되찾으려 던 서울진공작전은 실패한 것이다. 13도 창의군 해 산 후 경기북부지역의 의병 항쟁은 약화되었다. 13도 창의군은 의병항쟁기 최초로 시도된 전국적 규모의 연합 의진이었다. 이들은 전기의병기 척사론 (斥邪論)에 기반한 의병들과는 달리 한일간에 체결 된 여러 조약들의 불법성을 인식하고, 이를 성토하는 공문을 보내면서 저항하였다. 이처럼 13도 창의군의 활동에서 의병 항쟁이 단순한 무력 저항을 넘어 다양 한 형식의 저항법을 인식하였고, 이는 전기 · 중기의병 과 다른 후기의병의 다른 측면을 잘 반영하고 있다. 항일의병 13도창의군 탑(현충시설정보서비스 제공) 허위 의병장(1855~1908, 공훈전자사료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