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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 한말 전기 · 중기 의병의 봉기와 항전 – 홍주의병을 중심으로 33 30일 밤 11시 경에 동문에서 약 500미터 지점 숲 속 에 잠복하고 있다가 31일 새벽 일본 기마병들이 동 문을 폭파시켰다. 그러자 일본 보병과 헌병대, 경찰 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결국 홍 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일본군에 의해 홍주성이 점령되자 홍주의병은 큰 피해를 입고 해산했는데, 일본군은 기마병을 시켜 의병을 추격 사살케 하여 수백 명이 희생되었고, 이 때 많은 양민들 역시 희생되었다. 체포된 145명의 의병들 가운데 78명은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세영은 6월에 체포되어 황해도 황주의 철도에 유배되었다. 일본군 사령부의 심문을 받고 윤석봉 등 70명은 7월 에 석방되었으나 유준근, 신현두, 이식, 남규진, 안항 식, 이상구, 최상집, 문석환, 신보균 등 9명(홍주 9의 사)은 일본 대마도로 유배되었다. 1906년 홍주성 전투 이후의 동향 홍주성 전투에서 패한 이후 전기, 중기 홍주의병 에 참여하였던 의병들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했 다. 6월(음력) 청양에서는 이용규, 조병두, 채경도, 오 상준 등이 4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다시 의병 을 일으켜 일본군을 만나 교전했으나 패배하였다. 조병 두, 채경도, 오상준 등은 모두 체포되었고, 다른 의병 들은 흩어졌다. 이때 조병두는 공주로 호송되던 중 항거하다가 대전역에서 총살당하였다. 또한 9월 경(음력)에는 예산의 이남규 집에서 민종 식, 이용규, 곽한일, 박윤식, 박창로, 이만직, 홍순대 를 중심으로 하여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을 다시 일으키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 은 일진회원의 밀고로 일제측에 사전에 발각되어 무 산되었다. 10월 2일(음력)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 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받고 곽한일, 박윤식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 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받았다. 뒤에 온양 으로 끌려가다가 귀순을 거부하자 현장에서 학살당 하였다. 그 뒤 이용규도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을 받 았고, 민종식은 11월 20일(음력 10월 5일) 체포되었 다. 민종식과 황영수, 이용규, 박윤식, 김덕진, 곽한일 등 6명은 1907년 1월 25일(양력) 평리원으로 이송되 어 종신 유배형을 받고 전라도 지도로 귀양을 갔다. 홍주성 수복 기록화 홍주 9백의사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