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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문화 사랑방 • ‘망종’과 하지 125 이다. 전라도 지방에서는 마을 여 인네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 일제 히 오줌을 누면서 비를 빌기도 하 며, 아이들이 짚으로 용의 모양을 만들어 두들기거나 끌고 다니면 서 비구름을 토하라고 하는 곳도 있다. 또 다른 방법으로는 여성들이 우물에서 키에 물을 부어 비가 주 룩주룩 내리는 시늉을 하며 부지 깽이로 솥뚜껑을 두드리기도 하 는데 샘물을 바가지로 퍼서 솥뚜 껑 위의 체에 물을 부으면서 “쳇 님은 비가 오는데 하늘님은 왜 비 를 내려 주지 않으시나요.” 하는 말을 반복한다. 또 현병(懸甁)이라 고 해서 병에 물을 담은 다음 솜으 로 막아 대문 앞에 병을 거꾸로 매 달아 두어 물이 똑똑 떨어지도록 한다. 명산의 봉우리나 큰 냇가 등 에 제단을 만들어 신성한 땅으 로 정하여 부정한 사람들의 통행 을 금하는 등 정결히 하고, 마을 전체의 공동 행사로 제사를 지냈 다. 제주(祭主)는 마을의 우두머 리나 지방관청의 장이 맡았고, 돼 지 · 닭 · 술 · 과실 · 떡 · 밥 · 포 등을 제 물로 올렸다. 민간의 풍습에서는 피를 뿌려 더럽혀 놓으면 그것을 씻으려 고 비를 내린 다는 생각으로 개를 잡아 그 피를 산봉우리 에 뿌려 놓기 도 했다. 충청 북도 중원군 엄정면 목계리 는 이장이 제 관이 되어 한 강 줄기의 웅 덩이 속에 있 는 용바위에서 소를 잡아 용 바위에 피를 칠하고 소머리만 웅 덩이 속에 넣는다. 이때 흔히 키로 물을 까불어서 비가 내리는 것 같 은 형태로 만드는 주술적인 동작 도 한다. 고려시대에는 가뭄이 심할 때 임금이 직접 신하들을 거느리고 남쪽 교외에 나와 기우제를 올 렸는데, 일반에서는 시장을 옮기 고, 부채질하거나 양산을 받는 일 을 하지 않았으며, 양반도 관(冠) 을 쓰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종묘 · 사직과 흥인(興仁) · 돈의(敦 義) · 숭례(崇禮) · 숙정(肅靖)의 4대 문, 동 · 서 · 남 · 북의 네 군데 성 밖 과 가운데인 종각 앞, 또는 모화 관(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곳) · 경 회루 · 춘당대(春塘臺) · 선농단(先農 壇) · 한강변 등에서 기우제를 지냈 다는 기록이 있다. 기우제의 대상이 되는 신은 천 신(天神), 땅의 신인 지기(地祇), 큰 산의 신인 명산대천신(名山大 天神), 바람 · 구름 · 번개 · 비의 신인 풍운뢰우신(風雲雷雨神), 땅과 마 을을 지키는 신인 서낭신, 토지 신, 산신, 마을귀신인 동신(洞神), 용신(龍神), 수신(水神) 등이다. 충 농바우에 줄을 매어 끄는 기우제 풍습, 충청남도무형문화재  제32호 ‘금산농바우끄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