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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역사기행 • 중국 관내지역 독립운동, 그 현장을 가다 ① 107 큰 변화가 있다면 임정 요인들 이 살았던 근처 골목 영경방(永慶 坊)이다. 영경방 10호는 김가진 (金嘉鎭) 선생의 아들 김의한(金毅 漢)과 정정화(鄭靖和) 내외가 살던 곳이다. 그 후 김구(金九) 가족도 살았는데, 여기서 부인 최준례(崔 遵禮)가 낙상 후유증인 늑막염으 로 별세했다. 20~30년 전 갔을 때 는 가난한 골목이었는데, 지금은 고급스러운 카페 레스토랑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도산 안 창호 선생도 임정 초기 영경방 에 비밀 숙소가 있었을 것이다. 1919년 가을, 만주 길림(吉林)에 서 육탄혈전을 결의하며 창립한 의열단원 일부가 국내로 잠입하 고 단장인 약산(若山) 김원봉(金 元鳳)과 몇몇 대원이 상하이로 가 서 도산 선생을 만나 폭탄을 구해 달라고 졸랐다. 도산은 의열단이 임시정부 지휘 안에 들어와야 한 다고 고집하고 약산은 그럴 수 없 다고 버티었다. 결국 젊은 약산이 이겨서 폭탄의 껍질(점화장치)를 받았다. 황포탄 의거 현장 두번째로 간 곳은 황포탄이다. 1922년 3월 28일, 의열단원 오성 륜(吳成崙)·김익상(金益相) 두 의 사가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 치(田中義一) 처단작전에 나섰다. 명사수 오성륜이 권총을 발사했 으나, 다나카가 갑자기 몸을 숙이 는 바람에 미국인 여성이 총탄을 맞고 절명, 김익상이 폭탄을 두번 던졌으나 불발, 다나카는 피신하 였고, 김익상과 오성륜은 현장에 서 체포되었다. 황포탄 의거는 상하이 주재 특 파원들에 의해 전 세계로 타전되 었다. 대낮에 권총 쏘고 폭탄 던지 고, 중국인들이 못하는 일을 감행 한 의열단의 존재와 조선인들의 독립투쟁 의지가 선명히 드러났 다. 후폭풍도 컸다. 애매하게 신혼 여행 온 서양인 여성이 죽은 때문 이었다. 프랑스 조계 경찰은 일본 의 압력에 못 이겨 프랑스 조계 내 에서 총기 휴대에 대해 단속하기 시작했다. 미국 측도 비난의 뜻을 표했다. 동아일보 등 고국의 신문 ➊ 보경리 임시정부 청사. 말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➋ 임시정부 청사에서 가까운 영경방 골목. 김가진 김구 등 독립투사들이 살았던 골목으로 지금은 카페 레스토랑 거리로 바뀌었다.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