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page

순국 역사기행 • 양평 몽양기념관을 가다 101 여 “연못에서 고기를 탐내는 것은 물러가서 그물을 뜨는 것만 같지 못하다.”라는 옛말을 좇아 청년들 을 계몽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래 서 사랑방에 인근 청년들을 모아 놓고 지리, 역사, 산술 등 신학문 을 가르치기 시작하여, 양평에 광 동학교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동대문 밖에서는 광동학교가 근 대적 신학문을 가르치기 시작한 최초의 학교였다.” 이상설 선생이 만주에 서전서 숙을 세웠듯이 몽양도 양평에 광 동학교를 세웠다. 기념관 앞마당 주차장 앞에 ‘광동학교’ 표지석이 생각난다. 옥잠화 잎사귀가 표지 석을 꽃처럼 둘러싸고 있다. 표지 석이 꽃심 같아 보인다. 어떤 책에서는 이강년 의병장 이 몽양을 찾아와 경기도 의병장 을 맡아달라고 했다 한다. 상(喪) 중에 있어서 의병으로 나설 수 없 다고 몽양은 거절했다. 그보다 몽 양은 “임연선어 불여퇴이결망(臨 淵羨魚不如退而結網)의 길을 선택 하여 광동학교를 세웠다는 설명 문”. 기념관의 설명을 아무리 읽 어도 이해되지 않는 구절이다. 이 한자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 는 서울로 돌아와 도서관에서 책 을 여러 권 구해 읽게 되었다. “물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물을 짜야한다” “연못에서 물고기를 탐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결 코 얻을 수 없으며, 물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그것을 잡을 수 있는 그 물을 짜야 한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그 물을 짜는 일이라고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일요일에는 서울로 나가 숭동 예배당 선교사 클라크 목사의 설 교도 들었다.” 1909년, 클라크 선 교사의 도움으로 몽양은 광동학 교를 세우고 성경과 신학문을 가 르치게 된다. 이듬해 몽양은 강릉 초당리에 초당의숙을 설립하여 청년들의 의식 교육에 힘쓴다. 신 학문의 중요성, 국제 정세, 의병활 동,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는 항일 기사들을 가르쳤으나, 1910 년 8월 일제의 대한제국 강제병 합으로 몽양은 강릉에서 추방당 하게 된다. 이때 몽양은 나라도 잃 은 상태였고, 조부모와 부모를 몇 ➊ 광동학교터 표지석 ➋ 여운형 생가(필자 촬영) ➊ 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