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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눈 감을 수 있는 그날을 위하여 - 강화 교동지역 민간인 학살 피해자 72주기 위령제에 부처 옥효정(시인, 인천민족작가회의, 참살이 문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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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지금쯤이면 밥 짓는 냄새가 온마을을 뒤덮을 때입니다. 가족을 부르는 신호처럼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겠지요 그날은 저녁놀이 강화 앞 바다에 오래도록 머물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어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등에 업혀 간 막내는 출생신고도 하지 못한 갓난아기였습니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는 밤, 이불 속에서 밤새도록 떨었습니다 좌익도 우익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분류되고 사라졌습니다 열 살 때였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을 배우기 전부터 아버지라는 말은 금기어였습니다 얼굴 본 적 없는 아버지는 그리움조차 되지 못했습니다 장롱에 숨겨 놓은 사진 속 얼굴이 아버지라는 것도 몰랐습니다 사상도 이념도 모르고 살았던 평화의 땅, 하늘 문이 처음 열린 곳이라는 신성한 땅은 전쟁의 광풍에 피비린내 나는 땅으로 변했습니다 바다를 밀어낸 옥계 갯벌은 그날을 재현하듯 오늘도 붉은 몸을 드러냅니다 아버지의 부재는 우리의 부재입니다 아버지, 어머니! 그날 이후 칠십 이년이라는 시간은 흘렀지만, 진실의 시계는 그날에 멈춰 있습니다 전쟁에 감금된 불신의 소문만 무성하게 자라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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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향방위특공대는 강화경찰서장의 지시로 남녀노소 430여명의 이웃들을 가지리 않고 몰살했습니다 광란의 총부림은 '국가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었습니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내야 할 국가가 학살의 배후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의 진실은 바다에 여전히 수장되어 있고 부역자라는 누명을 쓴 죽음에 대한 안부는 생략합니다 그때의 착한 이웃들이 바다로, 논밭으로 일하러 가는 뻔하고 흔한 풍경을 다시 볼 수 없었지만, 그날의 희생자들이 '이제는 됐다'라면서 눈 감을 수 있어야 합니다 국가는 그날의 진실을 이제라도 명명백백히 밝히고 사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국가의 의무입니다 이것이 억울한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이자 예의입니다 학살의 광풍에 살아남은 것이 오히려 멍에가 된 피해자들이 공포와 절망, 분노, 슬픔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입니다 진실 규명과 사죄가 있어야 용서와 화해가 있습니다 그때야 비로소 평화의 땅을 되찾고 온마을이 하나 되는 대동세상이 열릴 것입니다 사슬재의 323기 봉분 없는 무덤에 통곡을 삼킨 나무들이 붉게 물들어갑니다 갑곶 나루에는 죽음조차 인정받지 못한 붉은 살점 같은 달이 바다를 건넙니다 밥 짓는 냄새가 온마을을 뒤덮고 가족을 부르는 신호처럼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정겨운 풍경 속으로 진실을 향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이제는 됐다'라면서 편히 눈 감을 수 있는 그날까지 '이제는 됐다;라면서 편히 잠잘 수 있는 그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