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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 1923년 3월 1일 고향 군외면 교인리에 교안사립학교를 오석균(법명 미산)선생과 설립하고 이듬해 교장을 취임하였으니 672명(남540, 여 132)이 졸업하였다. 1927년에는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 완도의 교이사립학교를 다니던 해남군 북평면의 학생들을 위해 북평인 서흥리에 동명학원, 이진리에 동광학원을 각각 세웠으나 1934년 3월 1일 일제의 강압에 폐교되었다. 하지만 폐교 직후 그 해 5월 23일 또다시 군외면 벌목리에 영창간이학교를 세워 1943년 5월 31일까지 9년간 운영했다. 그후 군외동공립학교로 변경되었고, 현재의 불목초등학교(폐교)가 되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소남의 끈질긴 교육운동은 '조국광복을 위함은 오직 후진교육이 선생되어야 한다'는 일념에 의한 것이었고 실제로 정남균, 유치오, 문승수,오문현,황상남, 김홍배 등 많은 제자들이 독립투사로 배출되었다. 1942년 태평양전쟁 말기 일제가 무기를 만들기 위해 명선욱공적철비를 부수어 다른 철과 함께 야적되어 있는 것을 돌이 황자사와 함께 일경의 눈을 피해 가면서 근처 황진리 조카집에 옮겨두고, 선생은 우리나라 역사책과 역대 가리포첨사 기록부를 지니고 불목리 앞 섬인 고마도로 은신하였다. 8.15광복과 동시에 이를 가지고 나와 완도중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이처럼 소남 선생은 항일, 교육, 운동을 하며 허례허식과 미신타파, 김 생산볍 개량, 농촌기계화, 산림의 녹화등 농어촌 계몽에도 힘썼고, 민족문화 방면에도 조예가 깊어 일제하의 감시를 피해가며 '청해비사',' 진한국마한사', 고문학갈설, 이독문연구,고어 활용법 등의 저서를 남겼다. 만녕에는 개척정신의 시범을 보이고자 소남 농장을 개척하였고, 함께 교인 사립학교를 세웠던 오석균의 인도로 1958년 76세의 나이에 "이 법대로 하면 자신과 세상이 바뀔 수 있다"며 원불교에 입교하여 불목교당을 창립했으며, 마음공부와 인성교육을 통해 사람을 바꾸고자 소남 농장을 교단에 기증하였으니 월불교 소남훈련원의 기지가 되었다. 1971년 12월 10일 파란만장했던 일생을 불목리 본가에서 고이 마치니 향년 89세였다. 배필인 순타원 이배기여사는 경북 선산 태생으로 일생을 선생의 뒤바라지에 헌신하였고, 슬하에 4남 2녀를 두셨으니 장남 재만은 기업인, 차남 재천은 불목교당과 소남훈련원 설립 운영, 3남 재백은 약학박사, 원광대학교 교수직에 있으면서 대산의료재단 익산병원과 원광제약 운영, 4남 소만은 동양화가, 탤렌트였던 손녀 창숙은 국민배우로 명성을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