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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 가평의 얼과 인맥 1928년 만주에서 참의부 · 정의부 · 신민부의 3부 통합회의가 개최되자 신숙은 신민부의 대표로 이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리 고 그는 삼부통합회의가 단체 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갈 리자 그는 김좌진이 이끄는 군정파에 가담하였다가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의 결성 에 참 여하였다. 그리고 그는 1930년 5월부터 중동선 이도하자에서 개최된 한국독립당 결성 준비 회에 대표로 참석하고 7월 위하현에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창립 시 한국독립당의 총무위 원, 군사위원, 문화부 위원장에 임명되었다.47) 1931년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수 립하자 한국독립당은 1932년 5월 한국독립군을 조직하고 길림성 자위연합군 제3군 고봉림(考 偏녀木) 부대와 연합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다. 이 때 신숙은 한국독립군의 참모 겸 길림성 자위연합군 제3군의 찬의로서 활동하였다.48) 그는1932년 음력 8월 15일 큰 전과를 올린 쌍성 전투에 참여 하였다.49) 그러나 동년 10월 중순 경 연합군의 제2치- 쌍성전투 때 한국독립군과 고봉림군의 연합 군이 일만군애 패하자 신숙은 이 청천과 함께 40여명의 잔존병력을 이끌고 오상현(五常縣) 사하자(沙河子) 지방으로 도피하였다 그리고 1933년 l월 영안현(寧安縣) 남호두(南湖頭)에 도착하였으나 다시 일만군의 공격을 받아 신숙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은 연락이 두절되는 곤경 에 처하였다 이후 잠시 시세영(榮世榮) 부대와 연합하였으나 그것마저도 적군을 막기 에 여 의 치 않았다.50) 그러자 한국독립군은 중국정부와 교섭하기 위해 신숙과 김상덕(金尙德)을 파견하였다 명령을 받은 신숙은 1933년 2월 남호두를 떠나 3월에 길림 에 도착한 후 국내로 잠입하여 천도교 중앙총부의 천도교인들에게 자금을 모집 하였다. 그리고 안동현으로 돌아와 장경순 (張敬順)의 차자 장덕근(張德根)과 함께 선편으로 대 련, 천진을 거쳐 1933년 5월 30일 경 상해에 도착하였다. 상해에 도착한 그는 이범 석의 도움을 얻어 구국군 부사령 공헌영(孔憲 榮)을 만나 600원을 지원받고, 김규식(金奎植)으로부터 500원을 지원받아 8월 중순 경 북경 으로 돌아와서 한국독립군의 잔여부대가 남경 등의 관내로 이동할 수 있게 하였다 51) 남경 에 도착한 신숙은 1934녀 2월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신익희가 이끄는 상해의 한국혁명당이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하는데 기 여하였다.52) 그리고 1934년 3월 다시 북경으로 돌아와서 안정문(安定門) 외 청하진(淸河鎭) 서이기(西 一雄) 농촌에 이거하였다가 1935년 2월 향산문두촌(香山門頭村) 정홍기(正紅雄)로 이거하였 다. 그런데 만주에서 노모의 위독한 소식을 알리기 위해 장남 신원균이 그를 찾아왔다. 그 는 노모를 보기 위해 만주로 가다가 12월 4일 영구(營 l二1)에서 일본경관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영구경찰서에서 17일간이나 취조를 받고 나온 그는 길림영사관으로 인계되었다. 여기 에서는 그는 수 차례의 심문을 받고 고초를 겪었으나 일제의 민족주의자 회유책으로 1936 47) 신숙 r나의 -生J , 88-89면 48) 국사편찬위원회 편 r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J 43{ 탐구당, 200이, 77-78면. 49) 국사편찬위원회 편 r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J 43{ 탐구당, 200이, 79면 50) 신축 r나의 -生J , 1 11 면 51) 신숙 r나의 -生J , 113.114면 52) 신숙 r나의 -生J , 115-12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