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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 • 가평의 얼과 인맥 2. 手淵 洪寶杓 先生 追幕牌文 대저 나라에 훈공이 현저한 인사에게는 정부에서 서훈(殺勳)하고 사회공익에 공헌(홈鳳) 하거나 효친(孝親)우애(友愛)하는 자에게 지역사회나 문중에서 칭송(稱짧)입표(立標)함은 전래의 미풍이다. 8.15 광복이후 우리나라에도 현대 정치 제도가 도입되어 대의 정치가 시 작 된 이래 우여콕절(廷餘曲折)을 겪으면서 반세기를 넘는 동안 이상실현은커녕 정 쟁으로 영 일(寧딘 )이 없는 오늘날 명리(名利)를 외면하고 오직 정도(正道)와 성실(誠첼) 겸 양(課濤)과 관용(寬容)으로 일관하면서 청절(淸節)의 인생을 살다 가신 우연 홍익표 선생의 정치적 고 절(高節)과 덕행(德、行)을 기리게 됨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선생은 1910일년 1월24일 경기도 가평군 외서면 청평리 182번지에서 부친 남양 홍순달 공과 모친 전주 이룡진 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생은 천품이 호매(豪遭)하고 인후(仁淳)영민(英敏)하여 일찍 이 경성제일고보(현 경기고 등학교)와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여 원근의 선 망(豪望)이 높았으나 환로(庫路)를 물리치고 영농으로 향리(獅里)제도(땀펄)에 힘쓰다가 1948년 마침내 정부가 수립되자 가평군에서 무투표로 제헌국회의원에 당선되어 반민특위 검찰부장과 헌법기초위원으로 국기(國基)를 다지는데 이바지하고 2대 국회에서는 원내총무 로서 운영위 원장을 맡아 대화정치의 탁월한 역량을 기울였다. 1955년 호헌구국세력 이 연합 하여 민주당을 창당하니 선생은 총무부장으로 당의 살림을 관장하고 1958년 4대 국회의원 으로 3선되었으며 1959년에는 독재로 기운 자유당 정권과 상대한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선거 대책위원장으로 치열한 선거전을 진두지휘하였다. 1960년 5대국회의원으로 4선되어 4 . 19후 내걱-책임제하의 민주당 정부가 출범(出$fL)하자 초대 내무부장관으로 입각하였으나 당의 분열을 막고 거국체제를 갖추기 위한 이른바 구 파(舊派) 5부 장관 영입문제가 제기되자 선생은 솔선 사표를 제출하여 당의 대단합을 촉구 한 일은 명분(名分)없이 딩-리딩-략에 급급하여 이 합집산(離合集散)을 거듭하는 정치현실에 살신성 인(殺身成仁)의 표식(表式)으로 남아온다. 1961년 5 . 16 군부세력 에 의해 헌정이 중단되었다가 1963년 정치활동이 재개되어 민주 당을 재건하고 부총재에 취임 같은 해 제6대 국회의원에 5선되어 당의 최고기구인 지도위 원과 운영위원을 지내고 1966년 야당 대통령후보 단일화(單-化)추진위원회 실행위원의 중 임을 다하였으며 1967년에는 민주세력 이 하나로 결집된 신민당이 창당됨 에 정무위원회 부 의장에 선임되어 정책정당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1년에 8대국회의원으로 6선되었으나 10월 17일 장기집권을 획책(劉策)한 박(朴)정권 (政權)의 유신(維新)선포(宣布)로 헌정의 본산인 국회가 해산되어 재야의 몸으로 돌아가니 헌법을 기초 제정한 제헌의원으로서 망연자실(뽑然티失) 그 허탈하였던 선생의 심기를 가 히 실-필 수 있으리오. 1973년 9대국회구성에 즈음하여 나라의 장래를 염려하는 각계의 원로와 정치중진들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