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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 가평의 얼과 인맥 로 천거되어 徵處園(휘경 원) 침-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고향 뿜漢(벽계)에서 후진 을 양성 하였다. 1864년(고종 1) 조두순의 추천으로 掌짧을훌(장원서) 別提(별제) . 全/號(전라) 都事(도사)를 거쳐 공조침-판에 이르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저서 華東歷史 合編網目(화동 역사합편강목) 60권 · 웰漢雅言(벽계아언). 12권 · 文集(문집 )60권. 朱子大全節疑패:補(주자대 전잡의 집보) 등. 바. 省齊(성제) 柳重敎(유중교) (국사대사전, 일중당, 1979년, 4월, 15일 발행 1011쪽) 1821 (순조21) 1893년(고종 30)조선조 고종 때의 학자. 자는 致政-첸程(치정-치정) , 호는 省齊(성제) , 본관은 고흥, 5세 에 학문을 이 화서의 문하에서 받았는데, 총명하여 노성한 사 람과 같았으며, 아이들과 놀기를 싫어하고 다만 經籍(경적)에만 몰두하였다 다시 重꿇(중 암) 金平默(김평묵)에게 배우고 21세 때 화서의 지도로 宋元華東史合編網目(송원화동사합 편강목)을 펀수했다 全齊(전제) 任憲n每(임헌회)를 호남에 찾아가고 心齊(심제) 柳時秀(유시 수)와 洪大心(홍대심)을 안성에 각각 방문하였으며, 繹工藍投(선공김-역)에 임명되었으나, 취 임하지 않고, 드디어 집을 嘉|찢(가릉)의 영당VË臺(자이 대)에 옮겼으나, 김중암의 거처와 가까 웠다. 1881년(고종 18) 중암이 간신들을 몰아내야 한다는 소를 올린 사건으로 절도에 안치 케 되 매 그를 따라 서울에 올라가 글을 올려 같이 벌을 받기를 청하였으나, 判堂(판당) 랴I 穩(신헌)이 전례가 없는 일이라 하여 받지 않았다. 정부에서 정 6품의 위계에 올리고 장치­ 관직을 맡기려 하였으나, 중교는 雪鐵山(설악산)에 들어가 나오지 않았고 지평의 벼슬을 맡겼으나 취임치 않고 죽었다 저서 : 太極l圖說(태극도설) 小大學說(소대학설) , 河圖洛書說(하도낙서설), 易說(역설) , 二 網五常’說(삼강오상설) , 三뿜仍義(삼서연의) , 人物性同異辦(인물성동이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