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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날 우리국토가 제국주의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 침묵을 강요받던 시절에도 지표면 아래를 흐르는 지하수처럼 뜨거운 민족혼에 바탕한 크고 작은 저항운동은 삼천리 강산 어느 곳에서도 그친 바가 없었다. 남녘의 섬 제주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으니 진취적인 기상으로 도내에서 손꼽히던 하귀의 청년들이 그 뒷줄에 설 리는 만무했다. 당시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배두봉 선생등 하귀의 피끓는 청년들은 조국의 독립을 되찾기 휘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이 우선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야학을 개설하였다. 하귀1,2구 두 곳에 각각 야학 소를 운영하였으며 애국심과 신학문에의 동경을 안고 모여든 학생이 근 백여명에 달했으니 그 열기는 충분히 짐각할 수 있다 하겠다. 그 정열은 결국 만세운동으로 번졌으니 1935년 봄(5월5일) 야학생 80여명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뛰쳐나와 관전동에서 미수샘까지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왜경에 강제 진압을 당하고 20여명이 외도주재소에 끌려가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위 제분외에 강경생, 강창선, 김을봉, 고붕익, 양군삼, 양군칠 선생등 10여명이 제주경찰서에 이송되었고 이어서 목포지청에까지 끌려가면서 선각자의 시련을 겪어야만 했다. 즈 중 강문일, 박영순, 김홍규 세분은 목포에서의 1심재판과 대구에서는 2심 재판을 거치면서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이토록 자랑스러운 투쟁의 기억과 기록이 뚜렸하고 분명하건만 해방이후 파란 많은 정국으로 말미암아 이제야 작은 빗돌 하나를 세우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부끄러운 일이라 하지 않으랴. 열사들의 후손된 우리들 모두 새삼 옷깃을 여미며 이 자리에 섰으니 피끓는 그 분들의 목소리가 지금인 듯 들려 오지 않는가. 그 날의 교훈이 이토록 생생하니 고향을 사랑하고 나라를 생각하는 청소년들이라면 이 작은 빗돌이 그분들을 기리는 마음의 끝이 아니라 작은 시작임을 다짐해야만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