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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5월31일 일요일 4 (제161호) 특 집 안곡서원은 도원재 박세희, 송촌 박세훈, 인재 홍섬 선생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으며,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해왔다.166 6년 인재(認齋) 민시중(閔蓍重,1625-1677)이 남양에 부임하 여 도원재 박세희 선생의 유풍(遺風)을 상상(想像)하고 유생 들의공송(公誦,공론을쫓아사람을천거함)을수탐(搜探)하 여 사실을 찾아냈다. 이에 우암(尤庵) 선생에게 가서 의논하 고 서원을 창립했다. 1667년 상냥을 올리고 1668년(현종 9)에 박세희(朴世熹)선생이위패를모셨다. 1670년에 박세훈(朴世勳), 1700년(숙종 26)에 홍섬(洪暹) 을 추가 배향하였으며,1721년(경종 1)에 ‘안곡(安谷)’이라고 사액되어 1729년(영조 5) 사액이 취소되었다가 1740년(영조 16)회복되었다. 1871년(고종 8)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위패는 서원부근에 매안(埋安)하고, 그 뒤 지방 유림과 문중의 협력 으로 1976년 복원 현재에 이른다.경내의건물로는6칸의사우 (祠宇),신문(神門),동서 협문(夾門)과 4칸의 강당등이있으 며, 사우에는 박세희를 주벽(主壁)으로 박세훈과 홍섬의 위 패가배향되어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 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19 86년 05월 20일 화성시 향토유적 제1호로 지정되었으며,상주 (상산)박씨 상암공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어 안곡서원유지 (安谷書院遺識)의상량문과행장을통해소개해보고자한다. ■서원상량문 아아!선생은 살아서는 천년에 한번쯤있을 성운(聖運,성왕 의 좋은 운수)을 당하였고, 구오(九五, 임금의 位)의 성한 때 를 만 났 다 . 하 늘 이 성 인 의 도 ( 道 )를 도 와 성 대 하 게 유 현 (儒 賢)의 무리를 열어 놓으셨으니, 유학을 일으켜 세우는 일에 뜻으 두어 성학(聖學)을 말미암아 마음으로 교유하였고, 절 차탁마(切磋琢磨)하는 동안 기(氣)가 하나로 모이고 덕(德) 이 합해지지 않음이 없었다. 사정(邪正,그릇됨과 올바름)이 진퇴(進退)하는 때에는 매양 음(陰)이 성하게 되고 양(陽)이 쇠하는것을근심하였다.상(床)을마주할때는정금(整襟,옷 깃을 여미어 모양을 단정히 함)하였고,오로지 몸을 가다듬고 반성하는 것에 공력을 다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 했으나 벼슬의 영화에 달가움을 느끼는 바가 없었다. 슬그머 니 당대 뭇 영재의 반열에 올랐으니 모두 존경하는 벗이라고 하며 서로 공경하였으며, 문명의 성화(盛化)를 도와 사방이 거의 잘 다스려질 수 있었다. 간흉(奸凶)들이 세력을 펼치는 것을 애석해 하였으나 이때에 도리어 사화를 일으키는 바가 되었다. 선생의 휘는 세희(世熹)이고 자(字)는 이회(而晦)이 다.조용하고정직했으며,청렴하고겸손하였다.서울주동(鑄 洞 ) 에 계 실 때 부 터 강 계 (江 界 )로 귀 양 갔 을 때 도 경 전 을 가 까 이 했으며 도원(桃源)이라고 스스로 이름 붙였으니 고을에서 오르내리고 저 멀리 바닷가에도 퍼져 먼 지방까지 이름을 남 겼다. -중간생략- 나이 겨우 마흔에 강계(江界)유배지에서 돌아가셨다.세망 (世望) 본시 드높았고, 생시에나 사후에나 모두 애석하였기 에 금을 지나 추모하기로 논의를 정하였다. 불행하게도 적사 (嫡嗣)가 없었으니 사람들이 매번 서예(庶裔)의 역량을 한탄 하였다. 석 자 높이의 다 쓰러져가는 무덤만 쓸쓸히 남아있으 니 누가 이 외로운 혼을 부르겠는가.황량한 언덕의 한 구석에 는 깨진 비석만 홀로 서 있으니 처량함을 면치 못하는데 더군 다나 제향(祭享)함에 있어 그묘당(廟堂)을꾸미기를바랄 수 있었겠는가.지금 우리 고을의 부사(府使)로 오신 민후(閔侯) 께서는 학문이 세가(世家)에 전해지고 높이 조반(朝班)을 우 러르며 경사(經史)를 두루 익히셨다. 기내(畿內)의 백성들에 게부임해오시어다면거경(居敬)의자세로스스로를다스리 고 번거로운 일오 백성을 괴롭히지 않으시니 문옹(文翁,여강 사람)이 앞장서 이끄는 것가 같아 모두 장려하는 풍습에 감복 하였으며,무성(武城)의현가(絃歌)와같아모두은혜로운정 치를 우러러 보았다. 다만 선현(先賢)이 의탁할 데가 없는 것 을 탄식하시어 이에 새로운 서원을 지어 추모하였다. 비용이 조금도 없었으나 백년동안 무너진 전례를 새로이 거행하고 목소리와 안색하나 변치 않은 채 천년의 성대한 의식을 주관 하셨다. 이 어찌 다만 산천의 변휘(變輝)이겠는가. 또한 가문 에서감격의눈물을흘릴것이다.지금3월20일 오시(午時)에 엄숙하게 상량하니 여러 유생들은 궁궁(芎 濃)하고 재심(齋 心)하도록하라.높고밝은강당에서많은선비들이반드시학 문으로써벗을 모으도록 하라. 이에 마땅히 송축(頌祝)하오니 조금도 가히 기록할만한 겨를이 없었으나 칭송함이 혹 더딜 까 염려하여 감히 한 마디 말을 엮어 육위(六偉)를 돕노라.들 보를 동쪽으로 던지니 청명산(淸明山)의 그림자 발밑으로 들 어와 어루만지고, 구천(九天)은 아직 없어 혼령이 여기에 남 아 있네. 응당 가장높은 봉우리에 올라 멀리 낙중(洛中, 남양 의 가운데)을 바라보노라. 들보를 남쪽으로 던지니, 바위아래 신령스런 샘은 정히 차고 달고, 이제부터 천년토록 혼령에는 의탁함이 있게 되었네,산에 가득한 바람 달은 솔을 따라 옮겨 가누나. 들보를 서쪽으로 던지니 호서와 호남의 돛단배들 왕 래하여 건너고, 멀리 삼도(三道)를 바라보면 조운선이 이어 져 있노니, 바다에는 거센 물결이 일어나지 아니하고 길을 아 득하지 않네, 들보 북쪽으로 던지는 옛날 당성(唐城) 아래의 연꽃 핀 연목, 연못 가운데선 가을 여름 연꽃을 피우네, 아득 히 우뚝선 군자 뛰어나도다. 들보 위로 던지니, 하늘에 해와 달이 걸렸으니 번쩍이는 빛은 환하고, 어진 이와 사악한 이, 굽음과 곧음을 아래로 내려 비추니, 사악한 이는 반드시 벌을 받을것이요.어진이는온세상이우러를것이다.들보아래로 던지니, 앞 시내는 몇 번이나 돌고 돌아 평야를 둘렀고, 어부 의 노래 소리와 목동의 피리소리는 서로 상응(相應)하네. 경 치는 상쾌하여 주야(晝夜)를 같이 하는 도다. 삼가 원하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하늘과 땅의 신령께서는 사우를 붙들고 비 바람을 다스리시어 제사를 오래도록 받들 수 있게 하소서. 정 령(精靈)이 편안할 것을 생각하니 땅 늙고 하늘 거칠어도 덕 음(德音)을 전할 표식이 될 것이다. 나와 같은 불초한 후손들 은기(氣)가체(體)를 채워주지못하고배움에는방향을몰라 가문을 쇠하게 만들었으니 조상을 욕보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는가. 마음에 느끼는 바가 있으니 다만 선조를 추모하는 효성만은 간절하여 감히 이에 피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 리고삼가짓는다. 정미년(1667, 현종8) 늦 봄에 종증손 전 승지 박일성 삼가 짓다. ■ 송촌(松村)·도원재(桃園齋) 두 선생을 봉안(奉安)했을 때 의제문(祭文) 중묘(中廟)때에뭇 현인들이성대하게일어났으니,시서인 의(詩書仁義)로 나라가 아름다워졌다.오직 송촌 선생은 처음 에는근교에은거하면서 학업을쌓고수행(修行)하였다.일찍 부터 밝은 빛을 드날리어 왕조(王朝)에 천거되어 휘정(彙征) 되었으니난실(蘭室)에있는듯하였고,그교분은금단(金斷) 할 정도였으며, 뜻하는 바가 같았고, 곧음을 함께 하였다. 지 위가 조금 낮기는 했지만 편안하게 도를 연마할 수 있었다.화 기(禍機)가갑자기일어나소나무가꺾이면학도날아가버리 듯 이에 다시 시골로 되돌아갔으나 의리는 더욱 빛났도다. 아 름다운 말과 어진 행실은 나라와 고을을 교화하였으니 백년 토록 이어 온 고향 마을에 그 아름다운 명성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다.어린 시절 집에 계실 때에는 형제들과 우애하였고,초 당(草堂)에 계실 때의 기량과 덕업은 밝게 천륜을 열 정도였 다.그 중에서도 도원재 선생이 특별히 뛰어났으니,삼가 생각 건대 도원재 선생은 뜻이 호탕하고 기개가 청아하여 고상한 것을 동경하고 옛 것을 사모하였으며,오직 도를 따라 걸었다. 태평성세를 당하여 조문정(趙文正)이 있었는데 임금의 신임 을 얻음이 그처럼 오로지 하였으니, 선비들이 서로들 기뻐하 였다.모두지금이이로운때라고생각하여“우리들이배운것 을 펼칠 수 있는 시기이다.”고 하였다. 나라를 위한 계책을 올 렸으니 요순의 도가 아닌 것이 없었다. 현인을 존중하고 준걸 한 자를 불러 들였으니 뜻은 갖추어졌고, 공(功)은 마땅했다. 강직한 성품은 악을 미워하였으나 향풀과 잡초가 본 바탕이 다르듯이특정사람에게편향되어나타내지않았다.진실로말 하길, “오직 충(忠)으로만 지극한 치세가 이루어질 것이다.” 고 하였다. 모적( 밌賊)이 내란을 도모하여 변방에서 십년을 지내다 마침내 관에 누워 돌아오셨으니 유학자들이 비탄에 잠기어 의기소침해지고 사림(士林)들은 서글퍼했다. 오직 이 남양은 두 현인의 고향으로 풍류가 어제와 같고, 유적이 여기 에 있으니 많은 선비들이 추모하고 있다. 이에 이 사우(祠宇) 를세워밝은영령을함께모시었다.옛것을상고해보니아아! 두 현 인 은 그 도 가 실 로 착 하 니 한 때 의 도 가 아 니 라 백 세 (百 世)의 영광이라. 바라건대 우리들의 제사를 돌아보시어 복을 드리워무강하소서.우재(尤齋송시열)짓다. △道源齋(도원재)박세희(朴世熹) 박세희(朴世熹)선생의 본관은 상주, 자는 이회(而晦) 호는 도원재(道源齋), 고려말(高麗末)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킨 명사(名士)이셨던 商巖(諱安義)공의 증 손(曾孫)으로 천성이 굳세고 정직하여 본시 중망(重望)이 있 었는데 과거의 방목(榜目)이 나아감에 조정에서 모두 사람을 얻었다고하례(賀禮)하였다. 중종9년(1514년)에 24세에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급 제(壯元及第)이후호당(湖當에뽑혀수학한다음5년간에걸 쳐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이조(吏曹)좌랑(佐郞), 충청도도사(都事),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사간원(司諫院)사 간(司諫) 등에 봉직하는 등 조정에서 신예 신료로서 주목을 받고있었다. 정암(靜菴,조광조)과 함께 오래 동안 경연(經筵)에 있으면 서나라다스리는법도를상론해왔던선생은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部承旨)로 있을 때에 입시(入侍)하여 주강(晝講 -임금 앞에서 하는 낮 강의)시에 “지금 인물이 가히 모든 관 직에있어세도(勢道)를유지하고있어재주와덕이성취되고 경륜의 큰업(業)을 닦은 이가적다”면서 정암(靜菴)선생의 인 물 됨 에 대 해 “젊 어 서 김 굉 필 (金 宏 弼 )을 스 승 으 로 섬 겨 배 우더니 장성하여서는 스스로 분발하여 도학에 전념하여 장구 (章句)에구애하지않고의리를탐구하니세상에서헐고비웃 는 사람이 많아 혹은 미친 사람이라 하고 혹은 재앙(災殃)의 모태(母胎)라 하여 벗들이 다 절교하고 사귀지 않았습니다. 광조가 이 때를 당하여 뜻을 세워 더욱 돈독히 하여 조금도 흔 들려 굴하지 아니하고 비로소 그 학문으로써 창도(倡導)하니 후생이 따르고 감격하는 자 심히 많았으며 신(臣)의 학문이 개발된 것도 또한 이 사람 때문이다" 라며 중용할 것에 대한 장계(狀啓)를 올려 그 뜻이 받아 들여져 선생은 정암 조광조 선생과함께도학정치를강력히추구하게되었다. 선생은악을미워하길원수같이하였으니당대에위세가등 등하였던 남곤(南袞)이 본시 사람됨을 미워하여 일찍 여럿이 모인 좌석에서 직접 그 간사함을 배척하고 소인들을 바른 의 론으로서 용납지 않으니 정암 선생은 9세나 연하되는 선생을 “나의 경외(敬畏)하는 벗이라 할 정도로 개혁신료들 중 좌장 과같은역할을하였다. 그러나 방만하게 남발되었던 중종반정(中宗反正)의 공훈 에대해위훈삭제(僞勳削除)를서두르는등 여러면에서급격 한 개혁에 피해를 보게 된 소인배(小人輩-훈구파 신료)들,특 히 남곤(南袞) 심정(沈貞)등 이적(二賊 -두 역적)을 중심으 로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반발한 훈구파 신료들이 동료인 홍 경주(洪景舟)의 딸 희빈(熙嬪)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 위왕(走肖爲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 하 여 走와 肖라는 글자를 합치면 趙자가됨을 이용하여 '조씨가 왕이 된다' 로 풀이해 백성이 조광조를 왕으로 세우려 획책한 다는 말을 궁중에 퍼뜨리는 잔꾀로 중종의 마음을 움직여 개 혁정치를 서둘렀던 조광조를 중심으로 하는 신진 사림계 신 료들을 일거에 타도하려 할 때 영의정 정광필이 울면서 만류 함에도 결국 정암선생은 사사(賜死)되고 선생 등은 정상(鄭 相-정광필) 간청으로 귀양을 가게 되어 선생은 상주로 유배 되었다. 상주 유배 이후에도 여러 간신들이 또 서로 임금에게 무고 하여 조광조가 지난날에 박세희의 무술이 특출함을 열거하며 병조판서를 제수(除授)할 것을 청한바 있었으니 앞으로도 비 상한 일을 도모 할 수 있음이라며 참소(讒訴)하여 상주 땅에 유배되어 있던 성생을 다시 극북(極北)의 변방에 있는 강계 (江界)로 이배(移配)시켜버렸다. 선생이 사어(射御-활쏘고 말타는 무술)를 배우지 않았었으나 능숙하니 사람들이 문무 를 겸한 인재라 하였는데, 이를 참소의 교묘한 구실을 삼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선생께서 어린 나이에 도를 들어 뜻을 세움이 심 히 견고하여 불행히 일찍 높은 과거에 올라 임금의 특별한 총 애를 입어 학문을 궁구하고 행의를 실천하는 실력을 크게 떨 치지 못하고 또 강직한 배짱과 곧은 말로서 간신의 노여움을 사서마침내북문(北門)의사화를만났으니때에나이29세였 다. 유배 중에도 선생은 오히려 경적(經籍 -성인이 지은책 즉 사서오경)으로 스스로 날을 보냈으며 그 중용(中庸)과 대학 (大學)에 공력들임이 더욱 많았으나, 임오(壬午-중종 17년- 서기1522년)에 모친의 부음(訃音)을 받고 통곡하며 마지막 가시는 길에 효행을 행하지 못함으로 슬퍼함이 과하여 병이 더 악화되어 경인(庚寅-중종 25년-서기1530년) 7月 7日마침 내적소(謫所)에서돌아가시니향년겨우40세였다. 중종께서 만년에 마음이 점점 깨우쳤으나 돌아가시고 인종 께서즉위하여비로소선생이복관(復官)되고그후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겸 동지경연춘추관성균관사 홍문관제학의 증 직을 내리셨다. 또 영조 22년 병인(서기1746년)에 영의정 김 재로(金在魯),좌의정 송임명(宋寅明)등이 나라에 아뢰어 기 묘명헌(己卯名賢)으로 학문과 절의가 특이한 분 18인을 해당 관서에 명을 내리어 증직(贈職)과 증시(贈諡)를 청하니 임금 께서 쫓으시니 선생께서도 같이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경 연 춘추관 성규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오위도총 부도총관 세자좌빈객의 증직을 받게 되었고, 문강(文剛)이라 는시호를받게되었다. 선생의 묘소는 남양에 있는 백형인 송촌공의 묘소 왼쪽 을 좌(乙坐)의 언덕에 반장(返葬)되었고, 위패(位牌)는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남양현감(南陽縣監) 민중기(閔耆重)공이 현 종 8년에 묘소 인근에 창건( 험建)한 안곡서원(安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으며, 그 직후 선생의 스승이자 백형(伯兄)인 송촌(松村)공 휘 세훈(諱世勳)과 동향(同享)하게 되어 지금 도 매년 문중인사들과 남양의 유림 및 이 지역 문화원장 등이 춘추로대제를올리고있다. 또 선생이 유배 길을 떠 날 때 “세도(世道)의 병(病)이 날로 깊으니 모름지기 영진(榮進)을 구하지 말라” 라는 선생의 경 계의 말씀을 따라 순천으로 내려가 은둔하며 학문에 전념하 고 있던 종질(宗姪)되는 운곡(雲谷)공 휘 증손(諱曾孫)이 선 생의 부음을 듣고 강계(江界) 천리 길을 즉시로 출발하여 영 구(靈柩)를 모시고 내려와 남양(南陽)에 장사(葬事)하였는 데, 이 같은 연고로 기묘명현이셨던 선생(文剛公 諱世熹)은 유학자로서 문행(文行)으로 호남지역에서 당대에 사표가 되 었던운곡(雲谷)공휘 증손(諱曾孫)과 또쾌열한위국충신이 였던 남포(南浦)공 휘 대붕(諱大鵬 - 諱曾孫의 孫子)등 상주 박문(尙州朴門)의 3인의 유풍을 기리기 위해 호남의 유림들 이 건립한 순천에 있는 이천서원(伊川書院)에도 배향(配享) 되어있다. △松村(송촌)박세훈(朴世勳) 박세훈 선생은 도원재공의 백형(伯兄)으로 자는勳之(훈 지)이고 호는 松村(송촌)이시다. 부친의 휘는 사화(士華), 군 자감부정(종3품) 증 호조판서인데, 처음에 효행으로 의영고 직장에 직배되었다. 어머니는 현감 신복담의 딸이시다. 홍치 원년 무신년(1488, 성종 19)에 태어났다. 유아시절부터 총명 하고효성이지극하여주자동효아(孝兒)로칭송이컷으며재 능이 탁월하여 8세에 소학을 수학함에 선생이 가르칠게 없다 하였다.1504년(연산군10년)17세 때 부친상을 당하여 부친묘 아래에 초막을 짓고 삼년상을 치르는데 죽만 먹고 애통하게 지내시니 고을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면서 감탄을 하였 다. 상중 도원재공과 인재공을 손수 가르치시어 후일 장원급 제를하도록하시였다. 공은 학문에만 전념하시고 벼슬에는 뜻이 없으셨으나, 이 때 모친의 나이가 연로하여 책망하며 말하기를 “우리 증조께 서는 대제학이셨고, 조부께서는 참판을 지내셨고, 아버지께 서 과거에 응시하지 않아 벼슬이 현감에 그쳤다. 너는 어찌하 여과거에응시하지않는것이냐”라고하였다.이에20세에사 마시험에 응시 합격하여 모친의 마음을 위로하였다. 그 후로 는 心 身 을 다 잡 아 처 음 에 품 었 던 뜻 을 지 켜 , 성 현 의 글 을 읽 는것만을 사업으로삼았다.중묘조(中廟朝)에어진사람들이 배출되었을 때 공은 재능이 많고 학문과 덕행이 있는 것으로 별과(別科)에 천거되었다. 그때 인심이 모두 하나로 모여 서 로 기뻐하여 말하기를 “효성스럽고 우애로운 사람이 지금 또 나왔다.”라고하였다.그 후조정에서여러차례벼슬을임명하 는명을내려제용감첨정(濟用監僉正)에이르렀으나사은숙 배(謝恩肅拜) 하였을뿐이고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그 때 공 의 둘째 아우인 도원재공이 정암 조광조,충암 김정 등 제현과 서로 도의로 사귀는 사이가 되었으며, 요순(堯舜)의 시대의 군민(君民)을만들려는 뜻을가졌다.공이 칭찬하기는하였으 나 또 번번이 경계하며 말하기를 “선비의 출처(出處, 출사나 은거)는 어질지 못한 사람에 대해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되 고 또한 어질지 못한 사람을 너무 심히 미워해서도 안 되는 것 이다. 너는 약을 미워하는 마음이 너무도 강하니 나는 그것이 염려된다.”라고하였다. 기묘년(1519, 중종14)에 사화가 일어나게 되어 도원재공과 어진 이들이 함께 화를 입자 사람들이 그 선견지명에 탄복하 였다. 공 역시도 기묘명현들이 천거하는 바가 되었지만 벼슬 할 뜻이 없었으며, 세태(世態)에 밝아 몸을 보전할 방법을 깊 이 생각하였다.그런 까닭에 화가 미치지 않았던 것이다.1522 년(중종17)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이때 동생 도원재공은 강 계에 귀양가 있었으로 공은 다만 감사공과 함께 남양에 있는 묘소아래를 지켰다.상기를 마친 뒤에는 교유(交遊)를 물리치 고 단정히 방에 앉아 고요히 서적을 대하였으며, 사물에는 마 음을 두지 않았다. 오직 마을의 자제를 가르치되 번번히 효우 (孝友)의도리를 권면하였다.소나무와대나무를 심어서 세한 (歲寒)의 깊은 취미를 붙이고 따라서 송촌(松村)이라 스스로 이름붙였다.공이늘자제들에게말하기를“내가죽은뒤에너 희들은지가(地家)의풍수설에얽매이지말고부모의묘소옆 에 나를 묻으라.”고 하였다. 1553년(명종8년) 향연 66세로 돌 아가셨다. 후일 이조참의에 증직되었고 기묘명현으로 안곡서 원에도원재공과함께배향되었다. △인재(忍齋)홍섬(洪暹)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퇴지(退之), 호는 인재(忍齋). 아 버지는 영의정 언필(彦弼)이다. 조광조(趙光祖)에게 수학했 다.1528년 사마시에,1531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1535년(중 종 30) 이조좌랑으로 재직 중 김안로(金安老)의 전횡을 탄핵 하다가 오히려 허항(許沆)에게 무고를 당해 흥양(興陽)에 유 배되었다.1537년 김안로가 제거된 후 복귀하여 수찬·부제학· 경기도관찰사·대사헌을 역임했고, 1552년(명종 7) 청백리에 녹선 되었다. 이어 좌찬성·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역임했으나 1560년 권신인 외척 이량(李樑)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사직 당 했다. 1563년 이량이 제거되자 판의금부사로 복직했고, 홍문 관·예문관 대제학을 거쳐 1567년(선조 즉위) 예조판서에 올 랐다. 같은 해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하자 원상(院相)이 되 어 정무를 처결했으며, 다음해 우의정이 되어 권신 남곤(南 袞)을 탄핵하여 관작을 박탈했다. 1571년 좌의정에 올랐으며 이어 영의정을 3회 중임했다.1579년 병으로 사임하고 영중추 부사로 전임했다. 븮주역븯·븮서경븯에 밝았고 정이(程 視)의 븮사잠 四箴븯을 좌우명으로 삼았으며,문장에도 능했다.저서로 븮인재 집븯·븮인재잡록븯이 있다. 남양의 안곡사(安谷祠)에 배향 되었 다.시호는경헌(景憲)이다. ▶안곡서원은 지난 2011년 6월호7면에 소개한바 있으나 다 소미흡하여수정보완하여다시게재하였음을알려드립니다. 뱚서원탐방 안곡서원 <경기도화성시서신면상안리585 > 안곡서원전경.맨뒷건물이 사당안곡사이고,앞 건물이 강당이다. 사당안곡사(安谷祀) 강당(講堂) 뱚■배향인물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