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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4월30일 목요일 8 (제160호) 관향조 종친회 븮동쪽의여명을밝히는우리들 의삶의길잡이븯 ‘노강선생의 한자이야기’가 한권의 책으로 발간되어 저자인 노강 선생이 본보 박순 구발행인에게전달하고있다. 뱜왜대한민국이인성과도덕이무너졌나? ‘蘆江선생의한자이야기’는자칫무너져내리기쉬운 뱜오상(五常)을깨우쳐주고근본(根本)을돈독히해주고있다. 정가20,000원 ! 구입문의한빛신문053-588-7300 절 의 ( 節 義 ) 의 상 징 돈 재 박 연 생 선 생 의 추 모 제 향 이 지 난 4 일 전 남 담 양 군 월 산면 월산리 묘소에서 래호 고문(노강) 의 집례로 18대손 재구 고문,봉구,래천 현종이 순서대로 헌작하고, 래지 회장 의 독축으로 봉행하고, 이후 자리를 옮 겨 전남 장성군 황룡면 금호리의 호산 재에서 역성(易姓) 혁명(革命)을 부끄 럽게 생각하라며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 던 돈재공의 조부 고려의사(高麗義士, 휘 承奉)을 비롯한 6代 18위의 제향을 래호 고문의 집례로 종손 경열, 균갑 전 회장, 봉구 현종이 각각 초헌과 아헌 종 헌을 맡아 헌작하고 재구 고문이 독축 했다. 이날 제향은 최근 전 세계적으로 확산 되고 있는 신종코로나바이러스(코로나 19)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 ‘사회적거리 두기’를 캠페인에 나서고, 뷺해외상황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수도권의 감염추세 가 진정되지 않고 있어 앞으로도 일정기 간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뷻이라는 정부의 입장 발표 등이 이어지면서 제향에 참례하는 종원수를 제한 한 가운데 래지 회장(도 유사)을 비롯한 균갑, 래호, 재구 전 회 장과 경열 종손, 임원진 일부만이 참례 해향화를받들었다. 래지 회장은 이날 제례에 앞서 최근 진성세를 보이지 않고 있는 ‘코로나19’ 로 인해 부득이 임원진만 참례한 가운데 제례를 올리게 되었다며 정성을 다하자 고 독려하고 종원 모두가 추원보본하는 정신이 가득해 선조님의음덕이 고루 전 달될 것으로 믿는다며 내년에는 더 착실 히 준비해 선조님 음덕에 보은할 것이라 며인사에갈음했다. 밀성박씨 돈재공파를 말하면 먼저 충 절의 가문으로 표현할 수 있다. 절의를 위해 은둔하며 태인박씨로 개관하면서 꼭꼭숨어들어갔기때문이다. 돈재공의 휘는 휘 연생(衍生), 돈재 (遯齋)는 아호이다. 밀성대군의 8세 도 평의사공(휘 언상)의 후예로 조부 고려 의사공(휘 승봉)은 인의현(仁義縣)에 적거(翟車)하신 휘 거인(居仁)의 차자 로 고려가 망(亡)하자벼슬을 버리고 은 거하여 의분(義憤) 한탄(恨歎)하며 형 휘 문봉(問奉)과 함께 기관(棄官) 경서(經書)로 마음 을 달래며 성현(聖 賢)의 학문을 닦았 다. 선생은 역성(易 姓) 혁명(革命)을 부끄럽게 생각하라 하자 모두들 의사 (義士)라 칭(稱)하 였다. 아버지 휘 덕명(德明)은 전남 장성군 에 최초 입향 한 입향조이다. 천부적인 용품이 일당천(一當千)의 기질과 불굴 초지로 무술을 연마하고 학리를 탐구하 며 1402년(建文 壬午 태종2) 무을과(武 乙科)에 입격하여 처음 벼슬이 승의부 위 호익순위사 우령부사정이다. 공(公) 은 병사훈련과 영병생활의 군율확립에 재능과 능력이 썩 훌륭하여 삼품상(三 品上)에 이르니 절충장군(折衝將軍) 훈 련원(訓鍊院) 도정(都正)으로, 배위(配 位)는숙부인(淑婦人)이다. 돈재공은 단종 조에 충무시위사대호 군에 이르러 수양대군이 왕위찬탈을 도 모하자 전남 담양 월산의 사위(돈암 이 석손) 집으로 낙향 은둔하 였다. 이후 세조가 수차례 불러도 나아가지 않자 좌 익원종훈권을 주고 다시 불렀으나 끝내 나가지 않 고 절의를 지켰으며, 족적 을 숨 겨 뜻 이 없 다 는 것 을 나타내고 본관을 태인(泰 仁)으로바꿨다. 이후 1831년 예조에 상 소하여 다시 밀성으로 복 관한바 있다. 이에 이해를 돕기 위해 상소문과 답신 을 함 께 실 어 보 고 태 인 박 씨와 월산면의 사위 이석 손 공 에 대 해 서 도 함 께 소 개해본다. [돈재공(휘 연생)의 사위 이석손과 담 양월산면입향유래] 돈암공 이석손(1397~1481)은 경주이 씨의시조알평공의57세손이고,중시조 인 소판공 휘 거명의 22세손이며, 고려 말 문충공 익재 이제현의 6세손이다. 소 경공 지회의 손자이며,요(瑤)의 아들로 써 서울에서 태어났다.어려서부터 재주 가 뛰어나 이미 5세때에 시에 능했으며, 야은 길재 선생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혀 사서오경을 통달하였고, 경해록 2권을 지었다.세종조에 집현전 학사에 발탁되 어 세자의 교육을 비롯 임금께 옳고 그 름을 아뢰는 임무를 수행하는 등 청환현 직을 두루거쳐 세자시강원의 정2품 좌 빈객을 역임했다.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함에 통분하여 벼슬을 버리니 친척 인 익평공 권람이 만류 설득하였으나 초 지일관 일편단심이란 글을 써놓고 장인 인 대호군 돈재 박연생과 함께 1453년 담양의 월산촌으로 낙향 은거하였다.세 조가 정3품 예조참의에 임용하고 여러 번 조정에 불러 올렸으나 응하지 않고 조용히 단종임금의 비통한 운명과 어지 러운 세상을 한탄하는 망세음이란 시를 지었다. 매월당 김시습과 문두 성담수 등과 벗 하며 도의친교를 맺고 후학들을 강론하 고 가덕산 자락의 황무지를 개척하여 후 손들의 보금자리 터전을 만들었다.이에 후손들이 560여 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번성하고 벌족을 이루어 월산문중으로 자리를잡았다. 밀성박씨돈재공(휘연생)·호산재시향 봉행 고려의사(휘承奉)을비롯한6代18위 돈재공이 사위 이석손 집으로 낙향 태인박씨로 살아왔던 전남 담양군 월산면 월산리 마을 전경(경 주이씨집성촌이다) 불사이군위해은둔하며태인으로개관븣1831년복관 호산재 제향 광경 월산사-담양군향토유형문화유산제15호 월산사는 돈재공의 사위 경주이씨 석손(碩孫) 공이 은거한 곳 에 1788년 도내 유림들이 발의하여 충효학덕(忠孝學德)을 갖 춘선비들을추모하기위해건립되었으며, 사우에는문충공익 재 이제현, 돈암공 이석손, 참봉 지정 이윤공, 야은 전록생, 지 지당 남포, 문정공 추강 남효온, 양성재 이관식 등 7현이 배향 되었다. 태인박씨는 밀성박씨 고려 공민왕 때 소감(少監)을 지낸 휘 거인(居仁)을 일 세조로한다. 공(公)은 신라 시조왕으로부터 44세 이고,밀양(밀성)박씨 시조 밀성대군 박 언침(朴彦 )의 15세이며, 고려문종때 도평의사(都評議事)로 밀직군(密直君) 에 봉군된 휘 언상(朴彦祥)의 8세 손이 다. 고려 공민왕 때 소감(少監) 벼슬을 하시다가 화를 입고 전라도의 인의현 (仁義縣)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정착하 여 살게 되었고 인의현(仁義縣)에 인접 하여 태산현(泰山縣)이 있었다. 거인 (居仁)께서 그곳 인의현에서 태산현으 로 옮 겼 으 며 그 후 2 대 를 살 았 다 . 공 은 문봉(問奉),승봉(承奉)두 아들을 두었 는데 승봉께서는 고려가 혁명을 당하자 은둔하셨다. 공의 손자 덕명(德明)께서 태종 2년 (1402)무을과(武乙科)에 합격하여 3품 벼슬에 까지 올랐다가 태인으로 낙향하 였으며.조선왕조는 국초에 전라도의 태 산현과 인의현을 합하여 태인현(泰仁 縣)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지금 의정읍,태인지방이다. 거인(居仁)의 증손자 연생(衍生)은 조선 단종(1453-1455) 때 충무시위사 대호군 (忠武侍衛司 大護軍)벼슬을 하 였는데 바로 돈재공(遯齋公)이다. 돈재 공(遯齋公,휘 연생)은 수양대군을 주축 으로 한 한명회 등 신진정치 세력이 왕 위를 찬탈하려 하자 이를 개탄하여 그들 을 피해 태인으로 내려가 아버지 덕명을 모시고 전남 장성 하남(河南)으로 은신 (隱身) 하였다. 후일 단종을 내쫓고 왕 위를 찬탈한 세조가 여러 차례 불렀으나 불응하고 다시 담양(潭陽) 월산(月山) 사위 이석손의 집으로 은둔함으로서 충 의를 지켰으며 본관마저 태인으로 바꾸 어버렸다. 돈재공(遯齋公)께서 밀성(密城) 본 관(本貫)을 태인박씨(泰仁朴氏)로 바 꾸니 이로부터 후손들이 박거인(朴居 仁)을 1세조로 하여 태인박씨(泰仁朴 氏)라칭하게되었다. 1831년 복관상소 후 태인박씨는 거의 가 밀성박씨로 돌아갔으나 일부가 아직 까지 태인박씨로 잔류하고 있다.돈재공 후손들이 복관상소(復貫上疏)파와 태 인박씨(泰仁朴氏) 잔류파로 나뉘어 공 존 하 고 있 는 샘 이 다 . 현재 돈재공 후손들은 32,000여명으 로 추정하는데 2000년 인구 및 주택센서 스 결과 태인박씨는 140가구 456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돈재공파 전체 인구의 1 .4%수준에해당된다. 전 라 도 장 성 유 생 유 학 박 규 혁 (朴 圭 爀) 등은 대종백합하(大宗伯閤下,예조 판서)에게 엎드려 삼가 글을 올립니다. 씨족의 중요한 본관(本貫)은 일찍부터 내려와 정해지거나 혹은 별자(別子, 제 후의 서자나 차남 이하의 아들)를 군 (君)으로 봉하여 정해지거나 혹은 공신 (功臣)에게 호(號)를 하사함으로써 정 해지는 것으로 아무도 스스로 그렇게 된 사 람 은 아 직 없 습 니 다 . 지금 저희들은 고려(高麗) 말까지 밀 성(密城) 박씨였는데 이조(李朝) 초에 휘 승봉(承奉)이 계셔 벼슬에 불러도 임 하지 아니하고 피하여 태인현(泰仁縣) 에 은거하여 그로인해 자손들이 거기에 살게 되었고,당시 대호군(大護軍)인 휘 연생(衍生)에 이르러 세조(世祖) 초에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태인에서 은거하 여 관(貫)을 태인(泰仁)으로 하였습니 다. 현손(玄孫) 수량((守良)에 이르러 높은 덕과 큰 명성으로 중(中)인(仁)간 에 명신이 되었고, 벼슬을 여덟 자리나 역임하였으며,형제와아들조카들이그 음직(蔭職)으로 청환(淸宦)에 제수되 었고,모두태인박씨로세상에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다시 지난 신유년(辛酉,1801)에 밀성 (密城)에서 대동보를 수보하면서 밀성 에서 나온 모든 박씨들을 남김없이 모두 본을 밀성(密城)으로 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저희들은 반드시 밀성으로 복관하 여 본을 되돌리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었 습니다.금년에 이르러 밀성파보를 수보 하면서 밀성에서 태인으로 하였던 것을 태인에서 밀성으로 하였으므로 비록 이 미 기술되어 공적인 가문의 문적에서는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할지라도 이에 감 히 엎드려 구하노니잘 헤아려 생각하셔 서 이후에 특별히 제목 아래 것들이 헛 되지 않는 기안(起案)이 된다면 퍽 다행 으로생각하겠습니다. [해조제음(해당부서의평론편지)] 이것은 경사(京司,서울에 있는 관아) 에서 제사(題辭, 백성이 제출한 소장 또 는 원 서 에 쓰 던 관 부 의 판 결 이 나 지 령 ) 를 매겨서 내어줄 수 있는 사항이 아니 지만 씨족에 관계되는 것으로 본관으로 밀성이 처음 봉해졌으며, 둔적(遁迹, 자 취를 감춤)시 태인으로 한 것은 임시변 통으로 한 것을다시 밀성으로 복관하는 것은 굳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 그렇게 추진할지어다. 온갖 만물의 삶은 세상과 함께 변하여 없어지기도 하고 전하여지기도 하면서 끝없이 변하는데 유독 성씨만은 여전하 다. 한당(漢唐) 이래 성씨는 임금으로부 터 하사받아 바꾸거나 굶주림을 피하기 위하여 바꾸거나 또는 나그네로써 바꾼 다.마치위기를넘기기위해서고치거나 화가 나서 발끈하여 고치는 것과 같고 주(朱)씨나 정(鄭)씨나 개의치 않아 허 무맹랑한 경우와 애매한 경우는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다. 이미 성을 바꾸거나 관을 바꾼 경우 왕왕 스스로 본 뿌리가 없어져 파도에 휩쓸리고 구름이 흩어지 는 것 같이 결국은 없어지는 것은 어찌 이상할일인가? 인간의 도리가 어떻다 하더라도 어찌 없어지겠는가? 문중(門 中)을 존중하고 관(貫)을 고치는 것은 협잡(挾雜)이 아니었고, 세상에 숨어서 스스로 자중(自重)하고자 한 것으로 중 간에 복관(復貫)하여 진실로 태어난 소 생이 기뻐하고 그 본을 잊지 않으니 각 자가자세한본래의뜻을보존할것이다. 백년 후에 지금 개관(改貫)하는 것은 무척 신중한 일로 아직 옛날 밀성(密城) 을 따르는 것은 선조의 뜻을 따르는 것 이다. 백년간의 장적(帳籍, 호적을 등기 한 장부)이나 사당의 간판과 함중(陷中, 신주나 위패 속에 파낸 흠)이 허다하고 문첩(文牒,관아에서 쓰던 서류)들이 있 는데 이것을 서둘러 고치기는 어렵다. 태인에서 밀성으로 따르는 것은 변동되 는 일이 아니고 올바른 것을 잃는 것이 아니다. 밀성이 바로 출생의 근본인 즉 종회에서 통합된 의견이므로 어찌 얻을 수 없는 의리인가? 분별없는 소견이 이 러하고 자신이 없는 일이었으나 널리 자 문하여결제하는바이다. /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 net) 관향조약사븣태인박씨(泰仁朴氏) 뱚태인박씨유래 돈재공파종중의요람(搖籃)인호산재와불사이군의충절을지킨고려의사(휘승봉)제단(左)전경 뱚신묘예조공문 뱚매산문경공홍직필답사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