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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복(輸永福, 1867년∼1935년). 휘(譯)는 영복(永福)이고 자(字)는 주언(周言)이며 호(號)는 유농(有農)또는 남농(南農)으로 불렸다. 유 • 소년기(助 · 少年期)부터 학문(學問)에 심취전념(深趣專念)하였다. 환로(庫路)에 출사(出{士)하여 여띄 관직(官職)을 거치고 대한제국말기(大韓帝國末期)에 통정대부(通政大夫) 강화군수(江華那守)를웅 역임(歷任)하였다. 1910년 일제강압(日 帝彈壓)에 의(依)하여 망국(亡國)이 되자 조국독립(祖國獨立)을 위짜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발각되어 1914년 일제총독부(日帝總督府)에 의하여 지명수배(指名手配)가 되자, 곧바로 중국으로 망명하여 인삼성CA參商)을 경영하여 번 돈으로 독립운동 자금조달(資金調達) 등,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 조직에도 참여한독립운동가이다. 지명수배가풀려 귀국후에도문중인과 지인(知人)들을 통하여 독립정신(獨立精神)의 고취는 물론 자신과 지인들의 재산 을 비밀지하조직(秘密地下組織)을 통하여 독립자금(獨立資金)으로 지원하는 꽁 각고(刻苦)의 노력을 기울였다. 묘소는 율동(票洞) 산 2-1번지에 숙부인(淑夫A) 곡부공씨(曲뿔孔民)와 신좌(辛坐) 합조(合兆)이다. 출처 : 성남향토문화총서-8 분당동, 서현동(율동마을), 수내동, 정자동 돌마마을지(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