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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31일 화요일 6 (제159호) 관향조 종친회 상주박문 중 상주파의 파조 휘(諱) 자완(自完-冠名은 完昌)선생은 고려조 공민왕 때에 태어나 고려가 망함에 젊은 나이(작은 숙부는 태조 2년에 생원시에 장원,아들은 태종 16년에 출생)에 이조(李朝)에는 불사(不仕)하는 굳 은 절의로 끝내 낙향하여 청산에 묻혀 오직 학문과 시음 (詩吟)으로 고결한 기상과 절의로 일관함에 이조태종(李 朝太宗)이 누징소명(累徵召命)하였으나 굳이 불긍(不 肯)하고 아래와 같이 작시(作詩) 불복표의(不服表意)하 였음으로 태종이 진로하여 벌정(罰定)한 바 그 읍(邑)의 호장(戶長)으로 정함에 공께서는 드디어 자완(自完)으로 개명하였으니,그 시의 뜻을 취한 것이고 그 절개 (節槪)를 온전히함을취한것이였다. 선생께서는 상주지역에 은거(隱居)하면서 제자들의 훈 육(訓育)과 향풍진작(鄕風振作)에 공이 컸고, 또한 절세 (絶世)의 문장력(文章力)으로 일세(一世)에 흠앙(欽仰) 을받았다. 그러나 선생의 후손들은 태종의 벌정(罰定)에 따라 상 주고을에서 호방(戶房-六曹 중 戶曹의 지방부서)직을 세 습하게 됨에 호구조사를 하고 토지를 파악하여 이를 바탕 으로 조세와 부역을 거두는 일과 군사를 통솔하는 등의 일 로 이방(吏房)을 맡고 있던 상산김씨와 함께 상주고을에 서 붙박이 토호(土豪)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던 것 이다. 선생께서도 상신(相臣),장신(將臣),대제학(大提學)을 포함한 10여분의 2품 이상의 고려 쩍 직계 선조님들의 후 손임은 물론이고,부친 안의(安義)공도 려조에서 등과(登 科)를 거쳐 려조에 이어 이조 세종 때에도 전농판사(典農 判事-정3품으로 고려 때의 명칭은 判典農寺事)를 지냈고, 세 분의 숙부들도 전부 판서(判書)에 이르렀으며 특히 삼 정승보다도 낫다는 대제학(大提學)까지 지낸 숙부 안신 (安信)은 비리와 무능에 대한 탄핵과 민생을 위한 상소를 담대하게 수시로 하였고 춘추사(春秋使)와 회례사(回禮 使)로 연경(燕京)과 동경(東京)을 다니며 수완을 보였던 세종대(世宗代)의 명환(名宦)이였던 등의 명문가(名文 家)의소생이였음은물론이다. 고을의 길흉을 좌우한다는 영험함이 전국적으로 알려 진 바위로 상주의 진산(천봉산)에 있는 비각으로 보호되 고 있 는 큰 바 위 인 ‘영 암 (靈 巖 ) ’의 한 면 에 호 방 (戶 房 ) 을 밭고 있던 한 호방의 실명(朴晩植-호방의 상위 기관인 戶 曹의 參議경력)으로 된 불망비문(不忘碑文)이 당시 목사 의 실명으로 된 불망비문과 함께 음각해 놓음이 말해 주 듯이 선생의 후손은 관향 상주에서의 적지 않는 영향력을 가지게는 되었던 것이다.즉 선생의 후손은 수년이 멀다하 고 교체되어 부임해 오는 수령들을 보좌하는 고을의 경제 기획 분야의 행정적 실권을 토박이로 관장하였던 힘이 있 었던것이다. 그러나 여러 분야의 판서와 판중추원사,판의금부사(從 一品),증 좌의정,한성판윤,평안감사 등등의 관로는 물론 장원급제(壯元及第) 후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영예를 가 진 종질(從姪), 장원급제 후 을사명현(乙巳名賢)이 된 족 손(族孫) 등등으로 명가(名家)를 잇고 있던 선생의 방손 (傍孫)들과는 달리 상주파라고 부르게 된 선생의 후손은 태종이 벌정(罰定)으로 내린 ‘호장(戶長)’이 부정적으로 변해가는 낙인효과(烙印效果)를 막지 못했던지 아래 표 와 같이 관로 진출이 많지 않게 되는 등으로 근 세기까지 이른바 양반의 호칭을 받지 못하는 수모(?)를 겪었던 것 이였다. 선생의 굳은 절의의 높은 기상에 대한 하늘의 이치(理 致 )를 묻 지 않 을 수 없 는 과 거 였 지 만 광 복 이 후 로 는 관 향 상주에서 두 분의 국회의원과 군수(郡守), 문화 원장, 시 의회 의장 등으로 기여하였고,몇 백년간 고을의 경제기획 를 담당해왔던 경력의 영향인지 기업인을 비롯한 여러 분 야에 걸친 이 시대의 문중명사에 차지하는 비중이 월등함 이조사되고있다. /尙州(商山)박문31세손 朴太淳 太宗의罰定으로貫鄕에서中 人으로전락된節義隱士의후 손 太宗의罰定이 보인節義隱士自完 선생후손의이력 朴自完商州人太宗朝以宣傳官召以前朝 臣不肯取作詩題曰 상주사람朴自完은태종조조정에서에선전관으로부르니 高麗의世臣이라하면서받지않고시를지어서썼으니 陶翁歸去後 도연명옹이돌아간뒤인데 商老是非間 상주의한 노인이 시비(是非)의 사이에 있네. 門掩靑山口 청산 어구의문을 걸어놓고 眞襟正自完 마음 가다듬어스스로온전함을이루리라 有以語 쇠 朝廷誣告者罰定該邑戶長遂改名自完取其詩意而盖有取 自全其節也 이런뜻으로풍자하니,조정에서무고(誣告)한자가벌을주기를그읍(邑)의호장(戶長)으로 정하였으므로,드디어자완(自完)으로개명하였으니,그시의뜻을취한것이다. 그리고그절개(節槪)를온전히함을취한것이다. -不服臣罰定錄에의한기록이라함- 입향조 휘는 계형(戒亨)이요, 호는 월파(月波)이다. 본래 전남 창평 사람으로 1693년 문과로 종사랑이었으나 숙종 27 년 임오년에 변을 당하여 영달을 구하지 않고 그 산수 좋고 깊 숙한 곳을 가려 회문산 아래 물우리에 들어가서 월파로 자호 하고 정자를 파도친 물가에 구축하여 화조월석(꽃 피는 아침 과 달 밝은 저녁이란 뜻으로, 경치가 좋은 때를 이르는 말)에 북두를 의지하여 바라보며 봄 이슬 가을서리 내릴 때에는 부 모를생각하며탄식하고신선같은생활을이어갔다. 월파공의 본관은 밀성으로 밀성부원군 태사공 휘 언부께서 중조가 되고 문익공 휘 효신과 충렬공 휘 공필과 상서공 휘 육 화와 시중공 휘 윤공과 정언공 휘 상례와 좌상공 휘 춘은 파조 이고, 문과로 행통훈대부 고산현감 겸전주진영 병마절제도위 하시고 증가선대부호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 관을지낸휘번은공의5대조가된다. 증조부휘홍정은호는송고,성균진사로통정대부첨지중추 부사를 증직되고 조부 휘 영철의 호는 고직당으로 진사시에 오르고, 광해의 폭정으로 과거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어머니 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 67세에 문과급제하고 통정대부행병 조좌랑과 승문원교검과 승정원승지를 두루 역임하시고 특별 히 부모를 모셔 시종을 들기 위하여 영춘현감을 제수 받는 등 효행으로유명하다. 아버지 휘 정연의 호는 죽계니 선무랑으로 어머니 의인 전 주이씨는 정숙하고 덕화가 풍부한 분이라. 공은 경진년에 출 생하여 어려서부터 천품이 단정하고 심지가 인후하여 부모님 께 효도하고 형에 공손하여 예의범절에 능숙하더니 자라서 수학함에 서당에서도 자리를 가려 독서하되 오래도록 자리를 바꾼 일이 없으며 늘 고훈을 상론하며 엄자릉과 도연명 같은 학자를 사모하더니 계유년에 문과로 종사랑에 천거되고 임오 변을 당하여 영달을 구하지 않고 그 산수 좋고 깊숙한 곳을 가 려 회문산 아래 물우리에 들어가서 월파로 호를 하고 정자를 파도친물가에 구축하여 화조월석에 북두를 의지하여 바라보 며 봄 이슬 가을서리 내릴 때에는 부모를 생각하며 탄식하고 신선 같은 생활로 숨어살며 뜻을 구하며 세상생각을 녹여 날 을 보내니 세상사람들이 「월파처사라하였다」한다.신해년 시 월십이일에운명하니향년이육십팔세라.임실군덕치면물우 리 간원에 안장되다.배는 전주이씨니 장문의 딸이다. 임인년 에 출생하여 현모양처와 부덕이 겸비한 분이다. 갑인에 졸하 니묘는공묘와합부하다. 월파공은 이남을 두었으니 장자는 순립이요, 호는 만화당 (萬化堂)으로 수직으로 가선대부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차는 순선으로 호는 국파(菊坡)며 자헌대부병조판서를 증직 받았 다. 만화당공(휘 순립)의 아들 승봉(昇鳳)은 통정대부 돈영부 도정, 손자 치운(致運)의 호는 석파(石波), 승지(承旨), 증손 재영(載榮)의 호는 문산(文山)으로 주경야독으로 학문을 탐 구하여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며, 봉제사에 전심진력 하고큰기근(饑饉)에많은사람들을구휼하니규장각한림에 증직되었으며,아들 세풍,달풍,복풍을 둠으로서 크게 번성하 게된다. 월파공의 차차 국파공(휘 순선)의 아들 승구(昇龜)는 가선 대부예조참판, 손자 치중(致重)의 호는 만은(晩隱)으로 효행 이 뛰어나 세칭 하늘이 내려준 효자라 불러져 통정대부 승정 원좌승지에 증직되고, 아들 동흥, 동철, 동복 동엽, 동인 등 5 형제를 두니 장자 동흥은 학생, 차자 동철은 无后, 셋째 동복 (東 福 )의 호 는 만 송 (晩 松 )으 로 어 려 서 부 터 글 을 일 깨 워 문 장 이 뛰나 학행과 효행으로 이름을 떨쳐 증 통정대부 승정원좌 승지이다. 넷째 동엽(東葉)은 통훈대부 사복시정, 다섯째 동 인(東仁)은학생으로후손들이크게번장했다. 월파공의 후손들의 학문과 효행으로 도(道)를 다해 지금도 그 명성이 이어지고 있어 임실지역을 대표하는 성씨로 또는 집성촌으로부상하고있다. 뱚집성촌 탐방 전북임실군덕치면물우리마을 월파공박계형1702년입 촌 물 우리 마을 전경 물우리 마을은 산과 산 사이로 넓게 둘러싸인 섬진강상류를따라구릉과산비탈에자연적으 로이뤄진전형적인시골마을이다.1702년월파 공 휘 계 형 (戒 亨 )이 처 음 입 촌 이 후 3 00여년 에 걸쳐살아온곳이다. 임실군은 사선대, 옥정호, 필봉농악, 소충사 등 문화와전통이살아숨쉬고있는충효의고장으 로 청정지역에서 생산된 임실고추와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임실치즈의 본 고장으로, 덕치면은 약담봉의남쪽 자락에 위치한 마을이 다. 산간지역이며 어느 정도 고도가 높은 지대 이다. 남쪽으로는 적성강이 흐른다. 또한 산지 이므로강이매우굽이굽이흐른다.자연마을에 는 물우마을, 두무마을이 있다. 물우마을은 마 을앞의섬진강의큰물로항상걱정이떠나지않 았다고하여붙여진이름이기도하다. 김용택 시인의진메 마을과 경계한 곳으로 주변 자전거도로가 유명한데 그 가운데 월파정이 단 연으뜸으로 많은 관광객들이 찾아 시인묵객이 되기도한다. 뱚입향약사 뱚 월파공의선원세계및행장 뱚입향조이후세계 월파정(月波亭) 전라북도 임실군 덕치면 섬진강변 낙락장송 숲 속에 세워져 경치가 아 름다워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1927년에?선조의 유덕을 경모하기 위해 세워졌으며, 월파공의 호를 따 월파정이라 한다. 섬진강변 노송(老 松) 숲 속에 있는 정자는 달이 뜨면 정자 아래를 느리게 흐르는 섬진강에 비친 달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찾아오는 관광객들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뒷 쪽에는 풍차가 세워져 있고 앞쪽에는 데크가 조성되어 산책로로 도안성맞춤이다.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