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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3월31일 화요일 10 (제159호) 종합 전북 정읍시가 정읍만의 최고·최초 ·최대·최다기록을 발굴하는 ‘별별 최 고를 찾아라! 정읍 기네스’를 최종 선 정, 청장년회 박기섭 직전회장이 등 재되는영광을안았다. 지난8일정읍시에따르면정읍기네 스 인증대상은 역사와 인물, 문화예술, 산업경제, 농축산업, 교육복지, 자연환 경 , 기 타 등 8개 분 야 94건 이다 . 인 증대 상에는인물편에정읍최장기이·통장 으로 재직한 김영환씨와 정읍 최다헌 혈왕 이명준씨,정읍에서 가장 오래 활 동한 기자 박기섭 광주일보 전북취재 본부장 등 26명이 이름을 올렸다.문화 예술 편에는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가 요 ‘정읍 사’와 전국 최 초의 민 간 향 약인 태인 ‘고현동 향약’ 등 10건이 선정됐 다.산업경제 편에는 최초 유역변경식 수력발전소 ‘칠보 수력발전소’와 정읍 유일재래식솜틀집‘대양솜공장’등23 건이 뽑혔다.또 교육복지 편에서는 가 장 오래된 초등학교로 ‘고부초등학교’, 가장 오래된 경로당으로 ‘정읍노휴재’ 포함 14건이 최종 선정됐다.정읍 기네 스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가치 있는 기 록과 시민들도 알지 못했던 정읍만의 독특하고이색적인이야기를발굴하는 공모전이다. 정읍시는 지난해부터 시 민공모를 통해 158건의 기록을 접수· 발굴하고 현지실사와 인터뷰, 신문기 사 스크랩 등 정밀한 검증을 거쳤으며 올해 최종 94건의 기록을 수록한 ‘2019 정읍 기네스’ 책자를 발간했다. ‘2019 정읍기네스’책자는지역내학교와도 서관 등 공공기관에 배부하고 시 홈페 이지에 게시해 시정 홍보자료로 활용 할 계획이다.정읍 기네스 인증대상 기 록보유자에게는책자와함께인증패가 수여된다. 유진섭정읍시장은“정읍만 의독특한 기록과잠재지역자원발굴을통해시민 들에게 소소한 즐거움과 자긍심을 선사 하고,고부가가치의매력있는문화관광 자원으로만들어가겠다”고말했다. 한편 박기섭 전 회장은 종친회에서 도 기네스북에 오를만하다. 청년회 창 립과 여성회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회관 건립 등 정읍시종친회 활성화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청년 회와 대종회의 가교역할을 하면서 청 년들 이 어른 들에 대한 공경 심과 효 사 상 고취,여성회와 함께 매년 어른들을 모시고 야유회를 개최하는 등 정읍시 종친회가 전국의 모범종친회로 거듭 태어 날 수 있는 데 크 게 공 헌해 와 어 른 들은 물론 청년들과 여성회원들은 전 설적 인 종친 으로 회 자되 고 있다 . /박호진명예기자(전북정읍시지부) 정읍시지부박기섭청장년회직전회장‘별별최고를찾아라!정읍기네스’선정 정읍에서가장오래활동한기자 박기섭전회장(뒷줄왼쪽첫번째○)이지난해종원들과함께선조유적탐방에서함께하고있다. 숭덕전 참봉으로 재임기간 하루하 루를 빠짐없이 기록 후인들의 길잡이 가 될 수 있 는 숭 덕 일 기 를 펴 내 는 등 朴 門 의 산 증 인 이 라 할 수 있 는 운 산 박희학 참봉이 미수(米壽)토록 건강 하게 살아오면서 남겨놓은 주옥같은 글과 공직생활을 기록으로 남긴 소중 한 글을 한데 묶어 기념집 운산만록 (雲山漫錄)을 펴냈다. 『운산만록(雲山漫錄)』은 각종 언 론·기관지 등에 투고해 온 700여 편에 이르는 칼럼과 시문(詩文), 만사(挽 詞),수필,여행기,건의서,서간문,서 ·발문 등으로 900여 쪽에 이른 박문의 소중한 정신의 향기가 담긴 정신사 (精神史)로 그동안 단행본으로 발행 된 「시집」, 「에세이1·2·3집」,「일기」, 「칼럼」, 「성재유고집」, 「밀양아리랑 가사집」,「숭덕일기」,등과 함께 소중 한기록물로전해질것같다. 운산 박희학 참봉은 은산부원군(휘 영균)후손으로일제강점기인 1933년 밀양에서 6남매 중 4형제 맏이로 태 어났다. 유소년기에 세계 2차 대전 등 암울했던 시간을 체험하였으며, 6.25 직후 대학시절에는 고향에서 문명퇴 치운동을 전개하였고, 1961년 공직 (농촌지도직)에 투신하여 가난을 벗 어나기 위한 보릿고개 퇴치 녹색혁명 (綠色革命) 완수와 새마을 운동의 기 수가 되어 농촌지도자육성, 식량증 산, 조국근대화 산업에 열정을 다 쏟 아대통령표창을비롯한상(賞)을 수 상했다. 공직에서 퇴직 후 밀성박씨대종회 감사. 이사(현 고문), 불사이군의 충절 을 지 킨 선 조 송 은 선생 현창 사업 및 대 소 종사(宗事)를 비롯 제218대 숭덕전 전참봉으로 2년의 봉직기간 하루하루 빠짐없이 기록으로 남겨 280여년간의 아무도 남기지 못한 「숭덕일기」를 남 기는등전대미문의기록을남겼다. 미수를 넘긴 지금에도 밀양시민신 문과 본보에 고정칼럼을 보내어 구독 자 의 교 양 향 상 을 위해 칼럼을 연재 하고있다. 한편 운산 참봉 은 기념집을 발간 하 면 서 자 기 에 게 주어진 이무를 팽 개치고 무엇이 진 리 인 가 에 는 귀 를 막고 오직 무엇이 자기에게 이로우냐 만 생각하고 날뛰 는 사람들 속에 살아오려니 실로 고 단한 인생살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며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기고한 원고 편 편을 정리하여 한데 모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행한 것으로 독자여러분 들이 깊은 양해를 바란다고전했으며, 1996년창간된 밀양시민신문에연재한 사설 283편과 2011년부터 본보에 연재 하기 시작 한 ‘박 근혜 대 통령 의 인생 역 정·중요국정활동및정치적역정등’6 년간(2017년 12월 30일 완) 연재된 방 대한 분량의 원고와 2018년부터 1년간 연재된 ‘박씨 청백리역사기행’, 2919년 1월부터 연재한 ‘한빛의 메아리(계속 연재)’ 등은 이번 운산만록에서 빠져 독자들은 다음 발간된 책에도 주목하 고 있 다 . 박희학前숭덕전참봉미수(米壽)기념집운산만록(雲山漫錄)펴내 700여편의기고문과詩文등 충남 논산시 연무읍 고내곡(高內谷)의 밀양박씨규정공后노곡공을모신성모재 의 재지가 발간되었다. 이번 발간된 재지 는 고내곡에 처음 터를 내린 노곡공 휘 영 주(諱 永周)부터 현손(玄孫)까지의 세장 천(世葬阡)에향화를받들고,이를수호하 고 관리하는 주체가 된 성모재의 유래(由 來)와역사적사실을정리한것으로제1부 성모재(誠慕齋) 서재(西齋) 관세정(觀世 亭)에 관한 각종 기문류(記文類)와 축하 (祝賀)의 사(辭)·시(詩)를, 제2부 세장천 에 관련한 묘비명(墓碑銘), 지석류(誌石 類), 아호(雅號)와 각종 상량(上樑), 고유 (告由),제막의식을,제3부 제의(祭儀),제 4부선세사실록등으로편제되었다. 성모재는 본보 한자이야기를 연재했 던 시조시인 황곡 박영록 선생의 선고 (先考) 내산공(內山公)께서 물려받은 세제(世第)를 헐고 창건하여 2003년 11 월에 건축물대장을 재실로 바꾸었다. 예부터재실은묘소 가까이에 건축하되 뒤쪽에는 짓지 않는다. 부정(不淨)을 피하고 심신(心身)을 깨끗하게 하여 제 사(祭祀)지내는 재실은 분묘(墳墓) 관 리와 의례도구(儀禮道具) 등의 보관, 문중을찾는 손님의 숙박을 위한시설로 재실에는 정신문화의 공간으로 향토사 적 정서가 곁들여져 있어 재사(齋舍) 또는병사(丙舍)라고도한다. 성모재의 연원을 보면 1924년 3월 23 일 목조초가지붕 4동 ㅁ자 9간 신축되 었으나 1951년 전쟁방화로 2동이 소실 되었고, 이후 목조를 철거하고 황토벽 돌구조에목조지붕위에기와로신축,2 000년 황곡서실로 이용하다가 2003년 재실로 용도를 변경하였다. 이후 2009 년 1 1 월 에 오 랜 세 월 로 퇴 락 한 재 사 (齋 舍)를 중건했다. 골조와 지붕은 옛것을 살렸고, 벽체는 철거했다. 기둥과 들보 추녀를 보강해 중당(中堂)과 양실(兩 室)이 모두 삼간(三間)인 건물로 새로 지었다.2012년 7월에 창고를 헐고 서재 (書齋)삼간(三間)을 신축했으며,곁들 여 병사(丙舍)에서 세천지(世阡地)로 오르는 길 중간에 관세정(觀世亭)을 아 담 하 게 지 어 자 손 ( 子 孫 )이 잠 시 머 물 며 사색하고 서재에서 독서하고 휴식을 취 하며 조상의 덕을 추모하고 화목을 도 모하며 소통을 하도록 했다. 당호는 성 모재(誠慕齋), 문호를 추원문(追遠門) 이라하여현판하였다. 성모재는 일반적인 재실의 목조건물 과는다르게나무기둥이비바람에 약하 고 잘 썩 는 것 을 고 려 하 여 건 축 비 도 절 감하면서 잘썩는 나무기둥을대신하여 황토벽돌을사용하였다. 바깥쪽에 두께 15㎝의 황토벽돌을 놓 고 사 이에 5㎝의 공간 을 띠워 놓 은 다음 안 쪽에 두께 10㎝의 황 토벽 돌을 쌓아 벽 체의두께가30㎝이다.그위에30㎝크기 의 도 리를 두 르고 장보 와 중보 를 건 다 음 에 마룻대인 종보의 뱃바닥에 상량일자 와 안녕을 기원하는 글귀를 추사체서예 연구가 완재 송기영 선생께서 현장직필 하고 별도로 현암 소병돈 선생이 성모서 재 기를 짓 고 김태 수 선 생이 글 씨를 쓴 상 량 문을 종 도리 를 떠 받치 는 뜬창 방에 봉 안하는의식을거행하는것이다. 노곡공이 고내곡 마을의 입향은 많은 사연을 갖고 있다.노곡공의 8대조는 영 의정 박승종, 7대조는 경기관찰사 박자 흥이다. 영의정 公은 1623년 능양군(陵 陽 君 )이 반 정 ( 反 正 )하 던 날 밤 에 성 문 (城門)을 나와 노원(盧原)에서 맏아들 감사공과 조우(遭遇)했다.능양군이 인 조(仁祖)로 등극했다는 소식을 듣고 광 주(廣州) 검천(劍川)에서 조정에 보내 는 유서를 남기고 부자 가 함께 자결했 다.두 달 뒤에 세자빈 박씨(관찰사공의 녀)이 교동위소(喬洞圍所)에서 절개를 지켜 자액(自縊)하자 사람들이 일문삼 절(一門三節)이라하였다. 인조 조정은 옥석(玉石)을 분간하지 못했다.유희분 이이첨과 같은 죄로 추율 (追律)하여 영상공 부자(父子)의 관작 (官爵)을 삭탈 (削奪)하고 재 산을 적 몰하 였다.집안이망할무렵난리를피하여정 부인 광주이씨(관찰사 박자흥의 부인) 는 먼 훗날을 위하여 과객(過客)들로 어 수선한 중랑포(中浪浦)의 빈민굴로 숨 어들어목숨을의탁(依託)하였다. 선대의 어진 덕행(德行)이 큰 덕(德)으 로 베풀어졌음인가 1632년(인조10) 11월 에 광주이씨는 누군가의 전갈(傳喝)을 받 고 아들 여정(汝精)을 앞세워 금부(禁府) 의쫓김을피하여그믐밤을틈타충청도로 남하하여 임천(林川, 현 논산)의 송정리 (松亭里) 산골로 숨어들었다. 여정(汝精) 은 휘 정예(廷 )의자(字)요,호는도암 (韜庵)이다. 노곡공의 칠대조모와 육대조 로송정리에입향한입향조이다. 임천군 홍화면 송정리 산골에서 은둔 회적(隱遯晦迹)하여 대를 이어온 후손 들이 선대의 죄적(罪籍)에 대해 매몰되 어 관아의 핍박을 면하지 못했다. 위로 는 선 조 들 이 저 승 길 로 들 때 마 다 대 (代)를 물려 낮 뜨거웠던 수모를 씻지 못하였고, 아래로는 후손들이 쌓이고 쌓인 아픔을 풀길이 없는 딱한 처지였 다. 후손들은 삶 자체가 오히려 조상을 욕되게 한다는 죄책감에 서산(西山)에 걸린저녁노을만원망하곤하였다. 1799년(정조23) 9월에 정묘조(正廟 朝)의 판부(判付)에 드러나 있고, 전후 선현들의입론(立論)도공안(公案)이구 비되었다.이에 임금이 영상 부자의관작 복 구를 명했 으나 후 손은 교지 를 받 지 못 하 여 신설 (伸雪)의 한을 풀지 못 하였 다. 말없이 선영(先塋)을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노곡공은 아들 종진 (鍾振)에게 “너는 영상다감과 관찰사 영감의 후손이다.”하고 집 안이 원통한 사연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아들 종진에게 두 가지를 당부했다.“정 부인 광주이씨할머니의피난사실이 하 나이고, 여러 일가를 모아 예조와 감영 에 소지(所志)를 올려 청원하는 일이 두 번째다.” 1857년 6월 12일에 철종은 故 영의정 박승종과 고(故) 감사 박자 흥의 복관작(復官爵)사를 특명하여 전 교(傳敎)를 내렸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일가 오십여명은의기투합하여 두달 뒤 인 8월에 소지를 예조에 보내어 청원하 였다. 그 후 1858년 2월에 예조당상이 수압 (手押)한 춘조완문(春曺完文)을, 10월에 본부완문(本府完文)을, 1859년 3월에 예조에서 내린 관문(關文)에 의 거하여 충청감사가 수결한 순영완문 (巡營完文)이 내려왔다. 1860년 10월에 예조의관문과순영의관칙에의거하여 임천군수가 수결하여 말단 동임(洞任) 이까지 전달되었다.영상공과 관찰사공 은 자결 230년이 지난 뒤에야 죄적(罪 籍)에서완전히탕척되었다. 노곡공은 도암공 대산소(大山所) 국 내(局內)에 투장한 쟁송사건도 종결 시 켰다.노년에는 안식처(安息處)를 찾아 금강을 건너 더러는 풍월을 읊고 5때로 는 구름 드리운 술과 시냇가를 자적(自 適)하며우유(優遊)하였다. 한편 성모재지를 발간한 황공 선생은 세상사람들이전통을외면하고도덕적 자아(自我)를 망각(忘却)한 채 의리를 뒤로하고,편리성만을추구한다면어떠 한 노력을 해도 우리의 문화를 지킬 수 없다. 미래는 곧 전통의 터전위에서 형 성되며, 창조(創造) 역시 전통과의 접 맥(接脈)을 통하여 싹이 트는 것이다. 선현들의 정신유산을 들추어서 새롭고 따뜻한 민족전통의 문물과 사조(思潮) 를 확립하는 일은 오늘의 우리들에게 부하(負荷)된 시대적 사명이 아니겠는 가.라고전한다. 밀양박씨 노곡공문중 ‘성모재지(誠慕齋 誌)발간븣븮미래는 곧 전통의 터전위에서 형성븯 충남논산시연무읍고내곡마을전경(숙민공后노곡공후예집성촌). 성모재(誠慕齋)-충남논산시연무읍고내곡로351. 성모재전경(뒤에보이는정자는관세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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