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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취의문. 1919년 중국 상해에서 발족한 한국임시정부가 일본제국주의의 강압과 국제공산주의의 책동 속에서 광복의 그날까지 무수한 신산을 겪어오던 암흑기에 우리의 광복투쟁을 물심양면으로 적극지원한 유일한 나라가 중화민국뿐이었음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그 중화민국의 장개석 총통이 우리 임시정부의 승인을 미국에 요청하였고 「전후 한국독립」의 원칙에 미국측의 동조를 얻어 이에 반대하는 당시 영국수상을 설복하여 1943년 11월 「카이로 선언」에서 연합 3국 수뇌가 「한국독립」을 천하에 공약하도록 한 공훈은 우리 한인 전부가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은덕인 것이다. 더구나 미국과 영국이 소련의 대일참전을 유도하고저 중화민국을 제외하고 소련을 끌어들여 「전후 한국을 미.영.중.소 4국이 구성하는 국제신탁통치기구하에 두기로 한다」는데 합의한 사실을 서기 1944년에 통고받자 송자문 외교부장으로 하여금 미.영.양국에 대하여 「국제관리반대와 한국독립촉구」의 외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시켰던 장공의 시종일관한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감루를 불금하게 하는 의협적 신의라 하겠다.그런데도 표면상 제3인터내쇼날을 해산하여 세계 적화 야욕을 포기한양 위장하고 내심으로는 중국과 한반도전체를 완전 적화시킬 원대한 흉계를 진행하고 있던 「스타린」의 음모에 속아 넘어간 미.영 수뇌가 서기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위 「4개국 공동관리안」마저 백지화하고 38도선으로 우선 한국을 분단점령하기로 소련과 밀약하게 되어 우리에게 오늘의 통고를 남기게 된 사실만 보아도 당시 한국의 운명과 중화민국의 성쇠가 직결되어 있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해방 직후 우리 안재홍 선생이 국민에게 호소한 바와 동일한 입장에서 장공은 부득 「대인」으로 대하여 「동양의 자유와 번영의 대도는 국제 공산주의 분쇄와 한.중.일 3국의 호혜노력에 있다」는 그 분의 신념을 실천하였으며 계속 우리 한국의 부강,발전,통일을 종생희구 성원하여준 「대지」와 「대용」이 서양열강의 「무지」와 「투안」속에서 유종의 미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그럴수록 장공 서거 후 우리 한인은 그분의 유덕을 더욱 경모불망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서기 1953년에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공로훈장을 장공에게 증정하였고 1961년에는 윤보선 대통령이 답례로 방화군사령관국(단장 박병배)을 파견하였으며 1966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무궁화대훈장을 장공에게 다시 증정하여 공시적인 사은인사를 갖춘 바 있다.그후 이 은인의 유덕을 잊지 못하는 국내 유지들이 윤보선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뜻을 모아 「장중정공 송덕사업회」를 결성하고 제1차 사업으로 장공 동상을 건립하기로 한 바, 그 위치 선정에는 주한 중화민국대사관측 의견을 참작하여 상해의거로 중국상하를 감동시킨 우리 윤봉길 열사의 고향인 충청도와 중심인 대전으로 결정한 것이다. 다행히 「감은봉사」를 교훈으로 하는 서대전여자고등학교 관계자 전원의 협찬으로 이곳에 중화민국 선총통 장공동상을 그분의 서거 15주기인 금년 4월 5일에 건립하고 동년 5월 길일에 제막하여 동교 전원의 수호경배는 물론 뜻있는 국민들의 부절할 참배송덕으로 우리 한인의 감은보덕의 정리와 한중 양국민의 영원할 우의의 상징으로 삼고자 하는 바이다. 단기 4323년(서기 1990년) 4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