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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2월29일 토요일 7 (제158호) 기 획 ▶6면에서계속 진원박씨는 위남공(葦南公, 휘 熙中)의 세 아들이 시조의 9 세손으로휘생(暉生),곤생(坤生),진생(進生)인데 장자인 휘 생은 성균생원으로 전남 보성으로 이거하면서 종파(宗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차자인 곤생은 성균진사로 장성의 중파(中 派) 파조가 되었고, 삼자인 진생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 을 지냈으며, 장성의 계파(季派) 파조가 되었다. 그리고 보성 의 종파(宗派)에서는 휘생의 아들인 10세손 문기(文基)의 세 아들이 11세손으로 흥원(興原), 계원(繼原), 윤원(胤原)인데 장자 흥원은 장종파(長宗派) 파조이며, 차자 계원은 장중파 (長中派) 삼자 윤원은 장계파(長季派) 파조로 오늘날 진원박 씨의5派를형성모든종문사(宗門事)가이루어진다. 장종파(長宗派)는 위남공(葦南公,휘 熙中)의 장자 휘 휘생 (暉生)으로 성균생원이다.그리고 그의 아들 휘 문기(文基)는 진사(進士)로 사온서직장이고, 지금의 보성 장종파(長宗派) 의 파조가 되고 아들 셋을 두었으니 장자는 흥원(興原)은 성 균진사요 차자 계원(繼原)은 1492년(成宗 23)에 생원진사에 합격, 음보(蔭補)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 삼자 윤원(胤 原)은생원이다. 직장공(휘 흥원)의 장자 익견(益堅)의 자(字)는 사위(士 韋),호는 회헌(晦軒)으로 成宗때 진사(進士)특히 문장과 효 행으로 이름을 떨쳤으며,행(行)통훈대부 강릉(康陵,명종과 비 인순 왕후 심씨의 능) 참봉을 지냈다. 회헌공(휘 익견)의 아들 지추(之樞)의 자(字) 윤극(允極)으로 1538년 무과에 입 격하여 충청도 절제사(節制使)를 지냈으며, 아들 셋을 두었 는데 장자 응두(應斗)는 경상도좌도(慶尙左道) 우후(虞侯). 차자 응장(應張)은 明宗때 무과에 합격, 감포(監浦), 강진(康 津) 현감(縣監)을 역임했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추증(追贈)되었으며 그의 아들 공한(公翰, 15世)은 어모장군 훈련원주부를지냈다. 절제사(휘 지추)의 삼남 응삼(應參)의 자(字)는 한장(漢 章), 호는 석정(石亭)으로 宣祖때 무과에 급제한 후 주부(主 簿)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에는 의병(義兵) 및 군량(軍糧) 을 모으는데 공을 세워 대호군(大護軍)에 오르고 부사직(副 司直)에 추증되고 아들 셋을 두었는데 장자 공신(公信)은 수 문장, 차자 공임(公任)은 부호군, 삼자 공의(公儀)는 장사랑 훈도(訓導)이다. 넷째 공건(公健)은 수직으로 통정대부에 가 좌되고다섯째공인(公仁)은학생(學生)이다. 직장공의 차자 익뢰(益牢)는 학생으로 손자 응기(應箕)에 이르러무후(无后)이다. 직장공(휘 흥원)의 삼자 익강(益强)의 字는 자위(子韋),호 는 송계당(松溪堂), 中宗(1519년)때 진사(進士)로 사마양시 (司馬兩試)합격했으며 효행이뛰어났다. 송계당(松溪堂, 휘 익강)의 아들 세린(世麟)은 성균 생원, 손자 응호(應虎)성균 생원으로 충순위(忠順衛)이다.종형 죽 천공과 함께 창의하여 음직으로 제주목사이고 아들 공철(公 喆)의 자(字)는 중길(重吉)이고 호는 빙옥헌(氷玉軒)으로 효 우가돈독하고문장과학행이뛰어나사림의추앙을받았다. 장중파의 파조는 장파 성균생원 휘 휘생의 아들 문기(文基) 의 차자 휘 계원(繼原)으로 1492년(成宗 23)에 생원진사에 합 격,음보(蔭補)로 소격서 참봉(昭格署參奉)이다.아들 균( 늡) 은성균진사이고아들넷을두었는데장자는이건(而健)으로 성균생원, 차자 이경(而儆)의 호는 오헌(梧軒)으로 성균진사 이고, 문강공 안방준(文康公 安邦俊)의 외조부(外祖父)가 된 다. 셋째 이인(而仁)은 학생이고, 넷째 이준(而俊)의 자(字) 는 준지(俊之),호는 오은(梧隱)으로 성균 진사(成均 進士)이 고 아들 광선(光先)의 字는 연재(連哉),호는 오곡(悟谷)으로 죽천 박광전(朴光前)의 문인으로 관찰사(觀察使)의 천거로 제용감(濟用監) 참봉으로 아들 넷을 두었는데 장자 동건(東 建)은 참봉으로 우산 안방중과 함께 병자호란 창의에 가담하 였으며, 차자 동식(東植)은 중추부사, 삼자 동수(東秀)는 병 자창의,사남동영(東榮)은학생이다. 장계파의 파조는 장중파 휘 계원(繼原)의 동생으로 생원이 다. 아들 연(衍),간( 갹) 위(衛)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연은 손자이성(而誠,덕산군수)에이르러무남(无男)이고,차자간 ( 갹)은 연산군 때 진사(進士)로 선교랑(宣敎郞)이다.그의 아 들 이의(而誼)는 성균 진사이고,손자광전(光前)의 자(字)는 현재(顯哉), 호(號)는 죽천(竹川) 또는 해교(海嶠), 경곡(瓊 谷)으로도불린다. 죽천선생은 부친의 권유에 따라 흥양(興陽, 현 고흥군)에 귀양온 인재 홍섬(忍齋 洪暹, 1504 ~ 1585, 조선중기 문신)에 게서 수학하였다. 그는 매일 자신의 집에서 흥양까지 수 십리 길을 걸어 다녔다. 그의 문명이 전라감사에게까지 알려졌다. 이에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과거공부에 열중이었으나 사장학 보다 내면의 수양에 힘쓰는 도학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성리대전(性理大典)’을 구해 유학의 기본원리 연구에 더 많은 시간을 두었으며,‘중용(中庸)’등을 읽으면서 스스로 깨우치는바가많았다. 죽천 선생은 20세에 과거를 보러 갔다가 석천(石川)임억령 (林億齡,1496~1568)을 만나 율기(律己) 공부에 치중하기 위 해 과거를 포기하고 귀향했다. 21세에 장흥 유치의 진사 문양 지(文씨亮之,증참의)의딸과혼인하였다. 22세 때에는 송천(松川) 양응(梁應鼎)에게 수학하였다. 죽 천선생은 치인(治人)보다수기(修己)에더 많은관심을기울 여 수학하였다. 출사하여 출세하기보다는 학문연구와 강학 (講學)에 더 큰 의미를 둔 것이다. 41세에(1566년) 안동 예안 에 계신 이황을 찾아가 수학하였으며,죽천집등 4권이 전해지 고 있다. 1568년(宣祖 1) 진사가 되었으며, 경기전 참봉(慶基 殿 參奉)에 이어 빙고 별좌(氷庫 別坐), 왕자사부(王子師傅) 를거쳐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함열과회덕(懷德)의현감 을 역임했다. 1592년(宣祖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 兵)을 일으켰고 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동복적벽전투에서 크게 공을 세우고, 72세에 돌아가신 후에 이조 판서(吏曹 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문강(文康) 의 시호(諡號)가 내려졌으며, 보성(寶城)의 용산 서원(龍山 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김인후 (河西 金麟厚),기대승(高 峯奇大升),이항(一齊李恒),유희춘(眉岩柳希春)과 함께 호 남 5 현 으 로 추 앙 받 고 있 다 . 죽천공의 장자 근효(根孝)의 字는 입지(立之), 호는 만포 (晩圃), 성혼(成渾), 이이(李珥)등과 교유하며 성리학(性理 學)을 닦았다. 1591년(宣祖 24)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이듬 해 임진왜란 때 동생 근제(根悌)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우의병장(右義兵將)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적을 무찔러 공 을 세워 군자감정(軍資監正), 장수현감(長水縣監)등에 임명 되었으나 辭退하였다.집의(執義)에 추증되다.죽천공의 차자 근제(根悌)의 字는 입보(立甫), 호는 옥현(玉峴), 1592년(宣 祖 25) 임진왜란 때 적을 무찔러 공을 세웠으며, 1597년(宣祖 30)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의병장(義兵將)인 아버지의 종사 관(從事官)으로출전하는등삼부자가임진정유양란에창의 한충의의가문이다. 장성 중파의 파조는 성균진사 휘 곤생(坤生)이다. 아들 셋 을 두었는데 장자 근지(謹之)의 字 는 덕중(德重), 호는 돈재 (遯齋), 사마시(司馬試)에 오르고 충순위 대호군(忠順衛 大 護軍)이다. 차자 양지(揚之)는 학생, 셋째 수지(守之)도 학생 이다. 대호군(휘 근지) 公은 아들 다섯을 두었는데 장자 창주 (昌柱)의 字는 국간(國幹)으로 1516년에 무과합격 진해(鎭 海) 현감(縣監)을 지냈다. 차자 명주(明柱)는 무후(无后)이 고, 삼자 형주(亨柱)의 字는 통경(通卿),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교랑(宣敎郞)이다.넷째 영주(榮柱)청백을 이어 받아 행실 (行實)이 독실(篤實)하고 성리학에 능통하여 사림의 추앙 (推仰)을받았고다섯째굉주(宏柱)는무후이다. 진해현감을 지낸 휘 창주는 삼남을 두었는데 장남 한충(漢 忠)의 字는 자량(子良)으로 무과에 급제 현감이다. 그의 아들 원효(元孝)의 字는 윤극(允極)으로 무과에 합격한 후 훈련첨 정(訓練 僉正)을 역임하였으며, 정유재란(丁酉再亂)때 용감 히 싸우다 전사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손자 승종(承宗)의 字는 백술(伯述), 선조(宣祖)때 무과에 급제한 후 상의원(尙 衣院) 첨정(僉正)과 영암(靈岩), 서산(瑞山) 군수(郡守)를 지냈으며,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임진왜란 때 선조 (宣祖)께서 피난(避難)하게 된 사실(事實)을 듣고 공(公)이 달려가서 선조(宣祖)를 지금의 의주(義州)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일등공신(一等 功臣)에 책록(冊錄)되고,1613년(光海 6)에 철권단서(鐵券丹書)를 하사(下賜)받았으며, 병조판서 (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고 양소(良昭)의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진해현감 휘 창주의 차남 한경(漢慶)은 손자에 이르러 무후 이고, 삼남 한무(漢懋)는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좌랑에 올랐 으며, 그의 아들 우(祐)의 호는 추재(秋齋), 선조(宣祖)때 무 과에 급제하여 선공감판 겸 첨정(繕工監判 兼 僉正)을 역임했 다.1597년정유재란 때일본의포로(捕虜)가되어서도충절을 굽히지 않았으며 조총의 정교한 기술을 배워 21년만인 1617년 (光海 10)에 송환(送還)된 후, 이를 후세(後世)의 환란(患亂) 을 막는 이기(利器)로 삼고 새로운 무기 개발과 제작에 공을 세워 예조유문(禮曹諭文)이 내려졌으며 병조판서(兵曹判書) 에추증(追贈)되고충열공(忠烈公)의시호(諡號)를 받았다. 선교랑공(휘 형주)은 아들 천석(天錫), 천성(天成), 천종 (天綜), 천민(天民) 등 4형제를 두었는데 장남부터 셋째까지 는 후대에 이르러 무후(无后)이고, 넷째 휘 천민(天民)의 호 (號)는 자은(自隱)으로 진사로 통정대부에 가좌되었으며, 어 버이 섬김에 극진한 예를 다한 효자이고, 학문이 뛰어나 교수 (敎授)를지냈다. 대호군(휘 근지)의 넷째 휘 영주(榮柱)는 청백을 이어 받아 행실(行實)이 독실(篤實)하고 성리학에 능통하여 사림의 추 앙 (推仰)을 받았으며, 아들 천서(天敍)는 통덕랑(通德郞이 고 행의(行義)로 훈도,孝行으로 향도(鄕道)에 천거(薦擧)되 었다. 아들은 지효(至孝)이고, 손자 몽진(夢辰)은 宣祖때 무 과에 급제한 후 찰방(察訪)을 역임하고, 통훈대부, 군자감정 (軍資監正)에 증직되었다.증손 사도(師道)는 통정대부(通政 大夫),증(贈)공조참의(工曹參議)이다. 장성중파의 파조 성균진사 휘 곤생(坤生)의 차자 양지(揚 之)의 증손 대붕(大鵬)은 진사, 현손 경방(敬芳)은 통훈대부 군자감정에증직되었다. 장성 계파(季派)의 파조는 진생(進生)으로 성균(成均) 생 원(生員)으로 승의랑(承議郞)이고, 장성(長城)에 살면서 계 파(季派)의 파조가 된다. 아들 삼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지 (摯)는 성균생원으로 아들 5형제를 두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차자 충(忠)은 무남(无男)이고, 삼자 서(恕)는 진·사마 양시 에 합격 통례원 인의를 지내고 아들 원침(元 ), 원률(元慄), 원항(元恒), 원순(元恂) 등 사형제를 두었는데 장자 원침은 무후이고, 차자 원률(元慄)의 현손 홍도(弘道)는 8세에 어머 니를 여의고 상례(喪禮)에 어긋남이 없었고, 이후 아버지 상 (喪)에도 3년의 시묘를 하는 등 타고난 효자이다. 셋째 원항 (元恒)은 통사랑이고, 아들 문(紋)은 통례원 인의이다. 넷째 원순(元恂)의 자(字)는 신이(信而), 號는 청계(淸溪), 선조 (宣祖)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김인후(金麟厚)의 문인으 로후진양성에힘써변이중(邊以中),이문룡(李文龍)등 걸출 한 문인(門人)을 배출시켰다. 장자 선철(宣哲)은 성균생원, 차자 준철(濬哲)의 호(號)는 기양(岐陽)으로 진사시에 합격 하였고, 어릴 때에는 성품이 활달하고 순박하여 구김살이 없 었으며, 나이 16세 되던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3년간을 어 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어른도 하 기 어려운 시묘살이를 하였다. 또한 홀로 계신 어머니를 극진 히 봉양하여 정성을 다해 효도하였으며 형과 누이에게도 우 애를 다하였다. 그런데 정유재란 때 모친을 등에 업고 왜병을 피하여 백양사에 들어가 깊숙한 산골짜기에 피신시켰으나, 갑자기 적이 들이닥쳐 그만 어머니를 해치고 말았다. 선생은 땅을 치며 슬피 울었고 3년간 상복을 벗지 않았으며 추울 때 나 더울 때나 무덤에 가서 인사를 드리곤 하였다.또한 거처하 시는 집이 너무 좁고 지붕이 낮아 다른 가족들은 불꽃같은 더 위를 못 이겨 괴로워했으나 선생만은 오히려 즐겨하였으며, 평생을 고통스럽게 지내면서 몸을 편히 갖지 않으셨다. 그러 다가 광해 임금 때 동해에 왜적이 출몰했다는 소문을 듣고 세 아들에게 이르기를, 뷺이제 어머님의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가 왔나 보다. 허나 이미 기력이 소모되어 성공치 못할까 두렵구 나.뷻하시며 우선 곡식을 진지로 옮기려 하다가, 이미 왜적이 진압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못내 아쉬워하고 탄식하였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 원순(元恂)과 함께 장성(長城) 학림사(鶴 林祠)에배향되었다. 진원박씨 문중에는 고려와 조선시대 명현석학이 많이 배출 되었다.특히 문장과 행의가 뛰어난 분들이 많았으며,임진·정 유양란에창의하여공훈을드러낸분들이많았으나다기록할 수없어다음에차차소개하기로하는아쉬움을남긴다. 시조 진문공 이하 위남공(葦南公, 휘 熙中) 이상의 上系先 祖(상계선조)들의 주거지(住居地)는 확실치 못하여 언제부 터 진원에 정작(定着)하였는지 문헌이 전해지지 않아 단언키 어려운 면이 있다. 혹인(或人)은 위남공 때부터 진원에 정착 하였다고 보는 이도 있지만 이는 상계보를 깊이 살피지 않는 데연유한탓일것이다. 始祖 進文公(시조 진문공)과 2세 孝大公(효대공)은 각기 대장군과 大相(대상)이었다는 官爵(관작)만 기록되어 있을 뿐 配位(배위)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그러나 3세인 검교장군 (檢校將軍) 휘 빈(諱 贇)이 금오위장군(金吾衛將軍)을 지낸 진원오씨 시조 오존석(吳存石)의 사위가 되었고 4세인 판군 기감(判軍器監) 휘 성량(成亮公)이 전주전씨의 시조인 전원 려(全元呂)의 사위가 되었으며 5세인 문하시중(文下侍中)과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휘 첨(諱 瞻)이 진원오씨 휘 익(諱 益)의 사위가 된데다, 또 6세인 전라도병마수군 절도사(全羅 道兵馬水軍 節度使) 휘 홍서(洪瑞) 公이 전주 최씨 휘 송(諱 松)의 사위이며 7세 구례감무(求禮監務)휘 온(諱溫)은 진원 전씨(현 담양전씨) 대사헌(大司憲, 휘 의)의 사위가 되었다. 이상 상계(上系)7세의 혼인 관계가 대부분 지금의 장성 주변 출신명족(名族)과이루어지고있는것을보면위남공이전부 터 이미 진원현을 중심으로 살면서 근향(近鄕)의 명가(名家) 들과 혼인 등 교류(交流)하고 있었을 짐작할 수 있어 진원박 씨의 진원 땅 정착의 연대는 대략 고려후기 명종 무렵 이후로 짐작되며 여기에서 진원고현(珍原古縣)을 중심으로 한 丘珍 (구진)이나 珍原(진원)으로써 貫鄕(관향)을 삼고 살아온 것 이라 생각된다.<세종14년의 팔도지리지에 박씨가 주성으로 등재되었다.> 진원박씨의 5개파 세거지(世居地)를 살펴보면 박희중(朴 熙中)의 세 아들이 9세손으로서 휘생(暉生), 곤생(坤生), 진 생(進生)인데, 휘생(暉生)은 성균관 (成均館) 생원으로 시거 (始居)하여 보성(寶城)에서 종파(宗派)의 파조가 되었으며, 차자(次子)인 곤생(坤生)은 성균진사 (成均進士)로 장성(長 城)의 중파(中派) 파조가 되었으며, 삼자(三子)인 진생(進 生)은 생원으로 승의랑(承議郞)을 지냈으며 장성(長城)의 계 파(季派)파조가되었다. 보성(寶城)종파에서는 휘생(暉生)의 아들인 10세손 휘 문 기(文基, 進士, 司온署 直長)의 세 아들이 11세손으로 흥원 (興原) 계원(繼原) 윤원(胤原)인데,장 자(長子) 흥원(興原 ; 進士)은 장종파 (長宗派), 차자(次子) 계원(繼原)은 장중파 (長中派), 삼자(三子) 윤원(胤原)이 장계파 (長季派)의 파조 가 되어 오늘날 5개 파로 모든 종문사(宗門事)가 이루어지고 있어, △장종파(長宗派)는 흥원을 파조로 보성(寶城)과 장흥 (長興) 지방에, △장중파(長中派)는 계원을 파조로 보성(寶 城)과 고흥(高興) 지방에, △장계파(長季派)는 윤원을 파조 로보성(寶城),고흥(高興),여수(麗水),화순(和順),광양(光 陽),장성(長城),전북(全北)임실(任實),경남(慶南)사천(泗 川) 지방에, △중파(中派)는 곤생을 파조로 장성(長城), 담양 (潭陽),나주(羅州), 신안(新安)과 전북(全北)의 임실(任實), 충남(忠南)의 연기(燕岐), 보은(報恩) 등지에, 계파(季派)는 진생을 파조로 장성(長城), 담양(潭陽), 나주(羅州)와 전북 (全北)의 임실(任實)지방에 각각 세거(世居)하면서 집성촌 (集成村)을 이루고 있었으나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 하면서 도시집중화 현상으로 현재는 광주, 서울 또는 지방도 시로 점차 거주를 달리하고 있다. 2000년기준 통계청 인구조 사 자료에 의하면 진원 박씨(珍原 朴氏)는 전국에 7,403세대, 33,630명(2015년기준)이 산거(散居)하고 있다. /글븡사진=박상섭 편집국장parkss1012@hanmail.net 위남공(휘희중)묘역:전남장성군진원면학림리. 뱚보성장종파(長宗派) 뱚보성장중파(長中派) 뱚보성장계파(長季派) 뱚장성중파(中派) 뱚장성계파(季派) 뱚집성촌 학림사전경:전남장성군진원면학림리 뱚파별분포및세거지 CMY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