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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EUX DE MÉMOIRE DU BATAILLON FRANÇAIS 프 랑 스 대 대 전 적 지 프 랑 스 대 대 전 적 지 12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프랑스대대 - LE BATAILLON FRANCAIS DE L’ONU DANS LA GUERRE DE COR EE 몽클라르 장군은 다양한 출신 (식민지 및 본국 주둔부대, 외인부대 등..)의 총 1021명의 용사들로 구성된 프랑스대대를 직접 지휘하기 위해 중령으로 스스로 강등한다. 프랑스대대는 1950년 12월 15일 미2사단 23연대에 배속되는데, 당시 미2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으로 후퇴하던 중 수많은 사망자를 낸 상태였다. 1951년 1월 4일~15일,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혹독한 추위속에서 프랑스 대대는 원주(p.25)지구 전투에서 처음으로 방어전에 투입되며 활약을 하고, 유엔군내에서 정예부대라는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한다. 이 시기 미 8군 지휘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 장군은 지금까지 유엔군의 붕괴를 가져온 중공군의 야간 인해전술도 우세한 화력과 부대원들의 강인한 정신력 앞에서는 실패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Le général Monclar reprend le grade de lieutenant-colonel afin de pouvoir commander lui-même cette unité, composée de 1021 hommes issus de tous horizons (troupes coloniales et métropolitaines, légionnaires… ). Le Bataillon est affecté le 15 décembre 1950 au 23 e Régiment d’In- fanterie de la 2e Division américaine, qui a été décimée lors de la retraite face aux Chinois. Du 4 au 15 janvier 1951, dans des conditions climatiques particulièrement di fficiles (-30°), le Bataillon français s’illustre pour la première fois lors de combats défensifs autour de Wonju (p.25) et commence à bâtir sa réputation d’unité d’élite au sein des forces de l’UNC. Le général Ridgway, qui prend le commandement de la VIIIe Armée, alors que ces combats interviennent, va démontrer qu’il est possible d e mettre en échec les tactiques chinoises d’infiltrations massives de nuit, jusqu’ici déstabilisante s pour l’UNC, grâce à une puissance de feu supérieure et un moral solide des troupes. Chungju, 24 décembre 1950. Campement de soldats du Bataillon français de l’ONU par -20°C. 한국전쟁 참전 유엔군 프랑스대대 원주지구전투 및 ≪ 쌍터널 ≫ (1951년 2월 1일~2일, p29), 그리고 지평리전투(1951년 2월 13~16일, p33) 에서 프랑스 대대는 리지웨이 장군의 새로운 전략이 빛을 발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미군 대대들과 격리된 상황속에서 그리고 수적으로 우세한 중공군의 야간 공격에 맞서 프랑스대대는 진지를 지키는데 성공한다. © ANAAFF ONU 청주, 1950년 12월 24일 영하20도의 혹한 속에 야영하는 유엔군 프랑스 대대 1950년에서 1952년 사이 유엔군 프랑스대대 이동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