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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연천군 항일운동 유적지 51 1907년 9월 25일, 법화동 인근 심원사(深源寺)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하던 김규식(金圭植) 부대 800여 명은 일본군이 기습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육군연성학교에 근무하였던 김규식은 1907년 8월에 양주 동두천에 머무르던 허위(許蔿)를 찾아가 그와 연계를 맺었다. 김규식은 마전, 삭녕, 연천, 양주, 철원 등지에서 활동하였다.96) 1907년 8월 무렵에 그의 부대는 800여 명에 달하였다.97) 철수하던 도중, 김규식 부대 중 약 150명이 27일 오전 3시에 법화동에서 일본군 김화(金化) 수비대와 마주쳐 격전을 벌였다. 이때 의병 20여 명이 죽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98) 이곳 법화동에서는 1908년 4월 23일에도 약 15명의 의병들이 일본군 연천수비대와 야간 전투를 하였다.99) 총독부 지도 2. 철원군 신서면 내산리 법화동 조사 의견 두 차례 전투가 벌어질 정도로 의병들의 주요 전투지이지만, 인적이 드문 산간지대여서 정확 한 위치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일단 대략적인 위치를 비정한 것으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96) 「김규식판결문」(경성공소원, 1908.8.25.). 9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í��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974, 111쪽. 98)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 ��독립운동사자료집�� 3-의병항쟁자료집, 1971, 702쪽. 99) 「폭도토벌경황 제72호」, ��폭도(暴徒)에 관한 편책(編冊)��, 1908. 4. 25; ��대한매일신보�� 1908년 4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