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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연천 항일운동 연천향교터는 연천군 최초의 근대식 학교가 세워진 곳이다. 현 연천군청에서 철길을 건너 6번 군도(郡道)를 따라 1㎞쯤 가면 읍내리 마을이 있는데, 도로 북쪽에 연천군 관아터가 있었 다고 한다. 향교터는 관아터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고 한다. 연천향교는 한국전쟁 때 건물 모두가 불타 없어져 버렸다.89) 바로 이곳 향교터에 근대학교가 건립되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교육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 로 확대, 발전하였다. 특히 실력을 양성해야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실력양성운동에 공감한 지역 주민들에 의한 사립학교의 설립이 매우 활발하였다. 1906년 연천군에도 근대학교가 처음 세워졌다. 연천군 유생 허숙(許肅)은 학부에 학교 설 립을 인가해주고 교과서도 보내줄 것을 청원하였다.90) 곧장 학부는 허숙의 건의를 받아들여 학교를 연천향교에 세워 인재를 양성하라고 지시하였다.91) 이렇게 연천군 최초의 근대학교 가 세워진 뒤에도 1906년 7월 무렵 흥립(興立)학교가 건립되었다는 기록,92) 지금의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지역인 장단군 고랑포 93)에 보창(普昌)학교가 세워졌다는 기록,94) 지금의 초등학교인 사립소학교가 마을의 빈집을 교사로 사용하였다는 기록 95) 등을 보아, 연천군에도 사립학교가 연이어 설립되었다. 89) 이우형 편저, í��향토사료집��, 연천문화원, 1997, 498쪽. 90) ��황성신문�� 1906년 4월 12일. 91) ��황성신문�� 1906년 4월 16일. 92)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7일. 93) 이우형 편저, 앞의 책, 465쪽. 지명 유래에 대해서는 ��향토사료집��, 63 474쪽; 연천군지편찬위원회, ��연천군지�� 하, 2000, 465 702쪽을 참고하여 작성하였으며, 이후로는 따로 주를 붙이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94) ��대한매일신보�� 1907년 5월 4일. 95) ��대한매일신보�� 1907년 6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