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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연천 항일운동 명의 주민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삭녕리에 들어가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의 발포로 3명이 사망하였고, 7명이 부상당하고, 9명이 체포되었다.81) 동면에서는 4월 5일 약 100명의 군중이 시위를 전개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하였다.82) 동면의 주민들은 이날 오후 북면 삭녕리에 가서 시위를 전개하였다. 관인면(현재 포천시)에서는 4월 10일 사정리 등지에서 시위가 전개되었다. 삼율리에 거주 하는 감리교 신자 조아당(20세)은 4월 1일 중면 삼곶리의 노상에서 중면 등지의 주민 400명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후 관인면의 박용길(朴龍吉)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 각지에서 학생 등의 민중이 조선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고 있으니 4월 10일 사정리 신촌동의 다랑고개에 모여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는 4월 10일 사정리의 다랑고개에 집합하라 고 하는 서신을 작성하여 박용길에게 준 후 그로 하여금 관인면의 각 동장에게 이것을 전달하 게 하였다. 4월 10일 조아당은 태극기 2매를 휴대하고 관인면 사정리 다랑고개에 가서 그곳에 모인 주민 수백명과 사정리의 신촌동, 남창동 등지를 연회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83) 그러나 헌병의 진압으로 해산되었다.84) 사정리 시위 이후 관인면의 주민들은 같은 날 초과리에 가서 일반인 600명이 비폭력적 시위를 전개하였고, 헌병에 의해 31명이 검거되었다.85) 4. 연천인 항일독립운동의 특징 첫째, 연천지역민의 항일독립운동에서 가장 높은 위상을 차지하는 것은 의병투쟁이다. 81) 고제10371, 「독립운동에 관한 건- 제39보」(1919.4.6), 일본육군성, í��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7, 1920.12. 30; 조선헌병사령부·조선총독부경무총감부, 「조선소요사건일람표」(1919.4.말),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1, 1977, 375쪽. 앞의 자료에는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되어 있고, 뒤의 자료에는 3명이 사망하 고, 7명이 부상당한 것으로 되어 있다. 뒤의 자료가 종합보고여서 뒤의 기록을 택하였다. 82) 일본육군성, 「소요사건에 관한 상황」(1919.4.7). 83) 「조아당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0.1.30. 84) 「독립운동에 관한 건-45보」(1919.4.12), 일본육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7, 1920.12.30. 85) 국회도서관, 앞의 책, 3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