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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연천 항일운동 의 발포로 3명이 죽고 3명이 부상당했으며 13명이 검거되었다.70) 검거된 사람 중 백천기 등 수 명이 옥고를 치렀다.71) 남면 입암리(현 양주)에서는 3월 27일에 독립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반인이 주도한 이 시위에는 500명의 군중이 참여하여 비폭력적 시위를 전개하였다.72) 왕징면에서는 3월 30일 강내리 부근의 주민 300명이 부근의 마을사람들과 함께 왕징면 기곡리에 가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면장의 참여를 촉구하며 시위를 전개하다 가 해산당하였고, 일제 헌병에 의해 6명이 검거되었다.73) 다음날인 3월 31일 왕징면 고왕리 에서는 제2차 시위가 전개되었다. 일반인이 주도한 이날의 시위에는 200명이 참가하여 비폭 력적인 시위를 전개하였다.74) 한편 왕징면 강서리의 이헌영(李憲永)은 1919년 4월 9일 황해 도 장단군 상도면 북리 공세영(孔世榮)으로부터 “자신은 경성결사단 파견원으로 각지의 독립 운동의 수모자를 방문하여 조선독립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 파견된 사람이다. 연천 지방 의 독립운동 상황과 수모자의 주소와 이름, 독립운동의 사상자 등을 조사하러 다닌다. 근일 서울에서 매일 독립운동이 일어나는데 일제 관헌은 겨우 1일 동안 구속하였다가 석방하므로 이곳에서도 독립운동을 하라.”고 권유받았다.75) 그렇지만 이후 시위가 전개되었는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다. 적성면(현재 파주시)에서는 3월 31일 장파리의 동산에서 횃불시위를 전개하였다. 적성면 장파리에 거주하는 한은동(韓殷東)은 3월 29일 밤 동리 구장 유병성(柳秉性)의 집에서 유병성 의 동생 유병익(柳秉翼), 우춘삼(禹春三) 외 수 명에 대하여 “다른 마을에서는 왕성히 독립만 세운동을 전개하고 있는데 우리 마을에서도 또한 동일한 운동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제의하 여 동의를 얻었다. 한은동 등은 3월 31일 장파리 안동(安洞) 뒤의 동산에서 약 20명의 군중과 1, 1977, 363쪽. 70) 국회도서관, í��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1, 1977, 363쪽. 7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560-564쪽;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1, 1977, 363쪽. 72) 국회도서관, 앞의 책, 367쪽. 73) 「독립운동에 관한 건-32보」(1919.3.31), 일본육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7, 1920.12.30; 국회도서관, 위의 책, 370쪽. 74) 국회도서관, 위의 책, 371쪽. 75) 「공세영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7.1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2, 1971, 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