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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37 전해들을 수 있었다. 연천지역 사람들 중에는 3·1운동 취지에 공감하고 연천에서도 독립만 세시위를 전개하려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연천군 백학면과 미산면에 거주하던 조우식(趙愚植), 정현수(鄭賢秀), 이낙주(李洛周), 홍 순겸(洪淳謙), 한상혁(韓相赫), 김문유(金文裕), 구금룡(具今龍)은 3월 1일 이후 각지에서 독 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전해 듣고, 각기 그 취지에 찬동하고 있었다. 3월 21일 오후 6시 백학면 두일리 시장에서, 미산면 석장리의 조우식(46세)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왕징 면 동중리의 정현수(21세), 미산면 석장리의 이낙주(24세), 백학면 두일리의 홍순겸(28세), 백학면 두일리의 음식점 주인 김복동(金復東, 31세), 미산면 석장리의 한상혁(43세), 백학면 두일리의 김문유(27세), 백학면 두일리의 구금룡(24세) 등도 솔선하여 대한독립만세를 외치 고 시장의 군중들도 동참하였다. 조우식이 발의하여 정현수가 면장 윤규영을 데려와 독립만 세운동에 참여시키고, 정현수가 민가의 문을 두드리고, 구금룡이 소방용 경종을 울려 군중의 참여를 독려하여 시장에 모인 군중이 200명에 이르렀다. 조우식 등은 200명을 이끌고 백학면 두일리의 면사무소에 가서 그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때 정현수는 백학면사무소의 직원인 정만기(鄭基萬) 등을 불러내어 시위에 동참시키려고 하였으나 이들이 불응하자 투석하여 면사무소의 유리창과 문을 파괴하기도 하였다.66) 이날 시위에서 23명이 검거되었다.67) 이어 조우식 등은 그날 밤 10시경 태극기를 앞세우고, 200명의 군중을 이끌고 미산면 마전 리를 향하여 행진하였다. 다음날인 3월 22일 새벽 3, 4시경 이들은 마전리의 문묘에 앞에서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후 이들은 미산면 석장리 로 가려다가 마전주재소 앞에서 저지되었다.68) 마침 미산면 통구리의 백천기가 3월 21일 밤 거주하던 통구리에서 모아온 주민 60명이 미산면 마전리의 헌병주재소 앞에 이르렀다. 백산면 두일리에서 온 군중과 미산면 통구리에서 온 군중들은 합세하여 3월 22일 오전 마전 리의 헌병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고 시위를 전개하였다.69) 이날 시위에서 일본 헌병 6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í��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560-564쪽. 67)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 1, 1977, 363쪽. 6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560-564쪽; 「독립운동에 관한 건-23보」(1919.3.22), 일본육 군성,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 7, 1920.12.30. 6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 1972, 560-564쪽; 국회도서관, ��한국민족운동사료�� 3·1운동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