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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연천 항일운동 이 무렵 연천 출신 의병들은 연기우 의진의 소부대에서 마지막 투쟁을 전개하였다. 연천군 군내면 지혜리(현 연천읍 차탄리 지혜동) 출생인 송병태(宋炳台, 1869년생, 1910년 42세, 농 업)는 연기우 의진의 의병 수 명과 함께 가평, 양평, 포천 등지에서 일본 군경의 추적을 피하 며 활동하였다. 그는 1910년 음력 6월 6일 양평군 일동면 수입리에 가서 이이원(李利源)으로 부터 군자금 20원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동년 음력 9월 8일 가평군 하북면 하목동에서 장응표 와 신현한으로부터 18원 56전, 동년 음력 9월 25일경 포천군 포천면 화현리의 차건영으로부 터 14원을 마련하였다. 또한 그는 동년 음력 10월 25일경 영평군 일동면 유동리의 김회창으로 부터 80원을 마련하고, 음력 11월 12일경 동면 화대리에 진출하며 면장 유재한으로부터 40원 을 마련하였다.64) 그리고 마전군 강신면 상고장리(현 왕징면 고잔상리)에 거주하던 이화선(李化先, 1886년 생, 1910년 25세, 농업)은 1910년 연기우 의진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김시경 의진에 참여하였 다. 이후 이화선은 1910년 음력 8월 8일경 마전군 강신면 기곡리 음동 이태재의 집에 가서 “김시경의 명령으로 왔으니 돈을 내라.”고 하여 군자금 6원을 마련하였다. 또 동년 동월 하순 에도 이학근과 함께 이태재의 집에 가서 8원을 마련하였다.65) 그렇지만 송병태와 이화선의 사례는 특별한 것이었다. 1910년 말 이후 연천 출신 의병의 활동은 그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졌다. 3. 연천인의 3·1운동 3월 1일 독립선언식과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의 독립만세시위의 상황은 여러 경로로 연천 지역 사람들에게 전달되었다. í��매일신보��에 ‘각지소요사건’ 등의 난을 통해 3·1운동 소식이 보도되었으므로 신문을 읽는 지식인들은 당시의 정세를 직접 파악할 수 있었다.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교회의 교인, 학교의 선후배, 동네의 친구와 지인 등으로부터 3·1운동 소식을 64)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69-170쪽. 65) 위의 책, 187-18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