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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연천 항일운동 연천지역 출신 중에는 양주의 홍원유 의진에 속하여 활동한 인물도 있었다. 마전군 하신면 구미리(현 백학면 구미리) 출생의 유경칠(柳敬七, 1889년생, 1909년 21세, 농업)은 1909년 음력 1월 20일 홍원유 의진의 최중식(崔重植) 외 수 명과 총기를 휴대하고 양주군 시북면 양촌리에 출동하여 주민 김만성(金萬成)으로부터 20원을 모집하였다. 이어 그는 1910년 음력 5월 30일 동지 두 명과 함께 군도와 총기를 휴대하고 연천군 상남면 면장 조용하(趙容夏)의 집에 돌입하여 그를 납치한 후 그의 집 북쪽으로 10여 정(町) 떨어진 남면 서산리(현 군남면 왕림리 서산)로 그를 데려가 위협하여 군자금 19원을 마련하였다.60) 이처럼 서울진공작전 후인 1908년과 1909년 연천지역에서는 박종한, 김수민, 연기우, 김시 경, 전복규, 홍원유 등의 지도로 의병투쟁이 지속되었다. 일본군의 ‘토벌’로 쫓기는 상황이었 지만 연천지역의 의병들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투쟁하였다. 「조선폭도토벌지」에 보이는 연천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들의 순국 상황은 다음과 같다. 1908. 2.23 연천 북방 약 8㎞ 지점에서 약 50명의 의병이 삭녕수비대의 군인들과 전투를 하다가 약 20명이 사망하였다. 1908. 3. 8 삭녕 남방 약 20㎞ 지점에서 약 100명의 의병이 삭녕수비대의 군인들과 전투를 하다가 5명이 사망하였다. 1908. 3.11 삭녕 남방 약 12㎞ 지점에서 약 10명의 의병이 개성수비대의 척후와 전투를 하다가 7명이 사망하였다. 1908. 3.20 연천 동방 약 8㎞ 지점에서 약 20명의 의병이 연천수비대의 척후 7명과 전투를 하다가 10명이 사망하였다. 1908. 4.22 연천 서방 약 8㎞ 지점에서 약 50명의 의병이 삭녕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12명이 사망하였다. 1908. 4.23 연천 동북 약 8㎞ 지점에서 약 15명의 의병이 연천수비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12명이 사망하였다. 1908. 8.16 마전 동북 약 8㎞ 지점에서 약 20명의 의병이 마전 헌병분견소의 헌병들과 전투를 벌이다가 3명이 사망하였다. 60) 앞의 책, 176-177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유경칠은 1911년 6월 징역 5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