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page

IV. 연천인의 항일독립운동과 그 특징 31 에서 60명의 의병을 이끌고 삭녕수비대 30명과 한 시간 동안 교전하고, 연천군 서면 옥계리와 마전군 서면 작동리와 강신면 고왕산 부근으로 분산 도피하였다. 1908년 11월 황해도로 이동 하였던 연기우는 1909년 3월 경기도 장단을 거쳐 삭녕, 강원도 이천, 회양, 통진 등으로 도피 하였다가 철원군에 근거지를 정하고 1909년 8월 5일 마전 분견소의 헌병과 보조원 6명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연기우는 9월 9일 이주보(李周甫)로 하여금 김수민이 체포되도록 밀고 한 마전군 하신면장 윤중규를 처단하도록 하였다.49) 연천 출신의 의병들은 1909년 들어 대거 연기우 의진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마전군 서면 내곡리(현 백학면 석장리)의 신무경(申武敬, 1876년생, 1909년 34세, 농업)은 1909년 1월 연 기우 의진에 참여하여 동월 의병 5, 6명과 마전군 강신면 산후동(현 왕징면 고잔상리, 현 비무장지대 내에 위치) 강한조(姜漢朝)로부터 100원을 모금하고, 음력 2월에 김광선(金光先) 과 연천군 서면 구룡리의 허은(許垠)으로부터 60원을 모금하였다.50) 그리고 마전군 강신면 중고잔리(현 왕징면 고잔리) 출신인 우윤구(禹潤九, 1883년생, 1909 년 27세, 농업)는 김시경 의진에 참여하여 1909년 7월 9일 밤 김시경 및 그의 부하들과 함께 연천군 북면 횡산리에 가서 한영근의 집에 숙박하던 개성군 미주정리 거주 조동협에게서 베 5필을 마련하였다. 이후 그는 홍원유(洪元有) 의진에 참여하여 마전, 양주, 적성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 1909년 9월 9일 밤 홍원유와 함께 마전군 하신면 면장 윤중구를 납치하여 살해하 였다. 또한 그는 1909년 11월 5일 김시경, 홍사렴(洪士廉)과 함께 연천군 서면 계명리(현 왕징면 강내리)의 이병철의 집에 가서 그로부터 군자금 8원을 마련하였다.51) 또 마전군 화진면 남계리(현 군남면 남계리) 출신인 이공업(李共業, 1891년생, 1909년 19 세, 농업)은 1909년 음력 9월경 연기우 의진의 선봉장으로 활동한 김시경 의진에 참여하여 동년 동월 미상일에 김시경 외 8명과 총기와 곤봉 등을 휴대하고 마전군 북면 유림리(현 왕징면 무등리)에 출동하여 이치일(李致一) 외 두 명으로부터 옥양목 한 필 등을 모집하였고, 동년 동월 미상일에 이들과 함께 연천군 북면 사동리(현 중면 중사리)에 출동하여 신경윤(申 49) 경기도사편찬위원회, í��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140-146쪽. 5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49-150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신무경은 1910년 3월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51) 위의 책, 138-139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우윤구는 1910년 2월 교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