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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연천 항일운동 장단군 장서면 관송리 고랑포(현 장남면 고랑포리) 출신으로 콩장사를 하던 한창렬(韓昌烈, 1882년생, 1908년 27세)은 1908년 2월 박종한 의진에 참여하여 중군장으로서 수십 명의 의병 을 이끌고 활동하였다. 장단군 설원에서 일본군의 공격으로 박종한이 부상을 입고 의병들이 도망하자, 그는 잔여 의병을 이끌고 최순좌(崔順佐), 이춘흥(李春興), 유충렬(柳忠烈), 이명준 (李明俊), 전복규, 최춘식, 이용현, 권중삼 등의 의병과 합세한 후 의병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최춘식, 이용현, 권중삼 등과 함께 1908년 음력 2월 하순 파주군과 교하군에 출동하여 공릉장의 집강 모씨에게 200원, 대원리의 주민에게 120원, 교하군 쇠현동의 집강에게 120원 을 모집하였다.46) 다음으로는 김수민 의진이 연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김수민 의진은 1908년 3월부터 12월 까지 장단, 마전, 삭녕, 철원, 토산, 양평 등지에서 활동하였는데, 특히 1908년 3월 24일 김수 민 의진은 고랑포에서 마전군으로 진출하여 군내면 냉정리에서 헌병 상등병 마스다(增田) 외 4명을 공격하였다.47) 장단군 장서면 고랑포(현 장남면 고랑포리)의 소금장사 출신으로 김수민 의진의 부장으로 활동한 최기서(崔起西, 1886년생, 1908년 23세)는 의병 수십 명과 함께 연천, 마전, 장단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그는 1908년 음력 10월 3~4일경 연천군 서면 영정리에 출동하여 이여담(李汝膽)에게서 벼 9섬을 마련하고, 동년 음력 11월 15일경 연천군 서면 안월리에 출동하여 강학원(姜鶴遠)으로부터 군자금 10원을 모집하였다.48) 그리고 연기우 의진도 연천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서울진공작전이 실패한 후 연기우는 자신 을 ‘조선존양창의대장(朝鮮[東韓]尊襄倡義大將)’이라 칭하고, 김성삼(金聖三)과 정현선(鄭縣 先)을 부장, 김중운(金仲運)을 중대장, 김시경(金時卿)을 선봉장 등으로 임명하여 조직을 정 비하였다. 이후 연기우는 1908년 2월 24일 의병 50명을 이끌고 철원군 신서면에서 철원 헌병 분견소의 이케모토(茂木敬吉)를 죽이고 총과 검 각 1정, 실탄 20발을 획득하였다. 그는 1908 년 7월부터 8월까지 강원도 철원, 황해도 평산·안협·토산과 경기도 장단·마전·연천·적 성·삭녕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연기우는 1908년 9월 19일 마전군 징파리(현 왕징면 징파리) 46) 위의 책, 19-23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한창렬은 1908년 12월 사형을 선고받고 순국하였다. 47) 경기도사편찬위원회, í��경기도 항일독립운동사��, 136-139쪽. 48)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14-115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최기서는 1909년 6월 징역 7년의 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