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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연천 항일운동 면장 정재정(鄭在貞)에게 의복을 제작하기 위한 재료를 요청하였다가 거절당하자 일본헌병대 에 밀고한 것으로 판단하고 1907년 음력 12월 17일 동지인 박종한 외 5명과 함께 정재정의 집에 가서 그를 총살하였다. 그리고 1907년 음력 12월 24일경 의병 2명과 함께 총검을 휴대하 고 장단군 장현내면 곽춘택(郭春澤)의 집에 찾아가 철봉 1개를 마련하였다. 또 동월에 의병 3명과 장현내면 홍준용(洪駿容)의 집에 가서 군도 1자루를 마련하고, 한규근(韓奎根) 외 3명 과 마전군 냉정리 정 모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6원을 모집하였다. 그리고 그는 1908년 음력 정월 4일 의병 2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장단군 장현내면 이석윤(李錫允)의 집에 찾아가 군자금 10원을 모집하였다.36) 연천군 북면 마거리(현 중면 마거리)의 현영원(玄永元, 1874년생, 1907년 34세, 농업)은 1907년 12월 30일 연기우 의진에 참여하여 1908년 음력 1월경 의병 70명과 총검을 휴대하고 장단군 무찰동에 출동하여 동민 수 명에게서 의복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37) 그리고 1907년 음력 8월경 연천군 관인면 남창리에 거주하는 돌절구 제조업자 진성교(秦成 敎, 1876년생, 1907년 32세)는 소위 의병 소모관(召募官) 박석구(朴錫九)의 권유로 박기복(朴 基福) 의진에 참여하여 일병과 1회 교전하였다.38) 또 마전군 군내면 읍부리(현 미산면 마전 리, 주소 마전군 동면 서원리)를 본적으로 하는 김화춘(金和春, 1883년생, 1907년 25세, 농 업), 마전군 동면 우정하리(현 미산면 우정리) 출신인 유성문(柳聖文, 1885년생, 1907년 23세, 농업), 마전군 동면 유촌상리(미산면 유촌리) 출신 강돌석(姜乭石, 1876년생, 1907년 32세)은 1907년 9월경 한유삼(韓有三) 의진에 참여하여 한유삼이 수원경무고문지부 개성경무분소 마 전분파소에 근무하던 한복진(韓福鎭)을 처단할 때 총을 발포하거나 망을 보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39) 1907년 11월 무렵, 연천 출신의 의병들이 참여한 김수민 의진, 연기우 의진, 김규식 의진, 36) 위의 책, 1974, 78-79쪽. 37) 위의 책, 157-158쪽. 이 활동로 체포된 현영원은 1910년 5월 징역 3년을 받았다. 38) 「진교성교 판결문」, 경성지방재판소, 1908.9.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í��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44-45쪽. 이로 인해 그는 유배 10년의 ���을 받았다. 39) 위의 책, 188-191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김화춘, 유성문, 강돌석은 1912년 3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5년을 받았다. 그러나 상고심에서는 1908년 1월부터 8월까지 金春實, 柳朔不, 姜石天이란 이름으로 귀순하여 면죄 문빙을 받은 바 있어 면소 처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