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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연천 항일운동 총기를 휴대하고 장단군 장신면에 출동하여 유해림으로부터 당나귀 1필, 8원, 그리고 잡품 8점을 모집하였다. 그는 또 1907년 음력 9월 15일 장단군 강서면 봉화동 우태연(禹泰淵)의 집에 가서 그로부터 12원을 모집하였다. 그는 동년 동월 30일경 마전군 강신면 고잔상리의 강한숙(姜漢俶)을 오게 하여 그로부터 6원을 모집하였다.25) 김규식 의진에 참여한 박종한 부대는 1907년 9월 13일경 강원도 철원군 보개산 부근에서 일본병과 교전하였고, 동년 9월 30일경에는 의병 140명과 함께 마전군 마전읍에서 일본병과 교전하였다. 김규식 의진의 한 부대는 1907년 9월 26일 저녁부터 보개산 심원사에서 일본 수비보병 제51연대 6중대와 50연대 6중대 1소대, 시라이(白井)중대, 니시가와(西川)중대의 포위공격을 받았다. 9월 27일 오전 3시 법화동에서 150명의 의병이 니시가와(西川)중대의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불행히 20명이 전사되었다. 이어 동일 오후 3시 신서면 대광리에 서는 250명의 의병이 시라이중대 및 아베(阿部)소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80명이 전사하는 피 해를 입고 도피하였다.26) 일본군의 추격을 벗어난 김규식 의진의 박종한 부대는 동년 11월 25일 경기도 장단군 방화 촌(芳花村)에서 200명의 의병과 더불어 일본군 및 순사대의 혼합부대와 항전하였다. 그리고 1908년 1월 6일에 장단군 사미천벌에서 의병 70명과 함께 일본군과 교전하였다.27) 한편 1907 년 12월 신서면 보개산 심원사에 근거하며 활동하던 김규식 의진의 700명의 의병은 신서면의 용담 사금광 등지의 광부를 모집한 후 철원읍을 공격하려고 하였다.28) 연천군 미산면 마전리 출생인 왕회종 29)은 숭의전(崇義殿) 참봉(參奉)으로 활동하다가 1907년에 그 직을 사임하였다.30) 왕회종은 1907년 8월경 연천에서 기의하여 80명 정도의 의병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9월경 경기도 장단에서 양주 출신의 김진묵(金溱默) 의진과 합세 하여 김진묵을 대장으로 하고, 자신과 정재학, 정경룡을 부장으로 하는 의진을 조직하였다.31) 25)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í��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70-171쪽. 이 활동으로 체포된 그는 1911년 3월 징역 3년을 받았다. 26) 「조선폭도토벌지」,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702쪽. 27)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1, 111쪽. 그런데 그는 1909년 6월 14일 장단군 구화장에서 그가 이끄는 의병 17명과 함께 구화장 헌병분견대에 자수하였다. 그는 유형 1년의 형을 받았다. 28) 「시국에 관한 상황(철원군)」(1907.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자료�� 8. 29) 「폭도사편집자료」,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3, 1971, 604쪽. 30) 한국고전번역원, ��국역승정원일기��, 음 1907.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