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page

16 연천 항일운동 한강 유역의 고구려 세력을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10군(郡)을 설치하였다.3) 10군은 한강 상류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하류지역은 백제의 몫이 되었다. 2년 뒤 신라는 백제가 점령한 하류지역마저 빼앗아 한강 유역을 관활할 신주(新州)를 두었다.4) 이 무렵 연천지역도 신라의 수중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연천지역을 차지한 신라는 757년(경덕왕 16)에 공목달현을 공성현(功成縣)으로 이름을 바 꾸고, 철성군(鐵城郡: 지금의 철원)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승양현도 경덕왕 때 동양현(㠉 梁縣)으로 개칭되어 철성군의 영현이 되었다.5) 신라는 8세기 말에 와서 무열왕 계열의 왕통이 끊어지고 귀족들 사이의 권력투쟁이 치열하 게 벌어져 150여 년간 무려 20명의 왕이 바뀔 정도로 왕위쟁탈전이 격렬하게 이어졌다. 이 때문에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세력이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성주나 장군이라고 자처한 이들은 자기 관할 하의 백성을 다스리면서 세금을 징수하고 노동력을 징발하였다. 그들은 점차 궁예(弓裔)와 견훤(甄萱)에 포섭되어 갔다. 강원도 명주(溟洲: 지금의 강릉)지역에서 성장한 궁예는 중부지방으로 진출하였다. 895년 궁예는 철원 일대를 장악하고 나서 그 다음해 철원에 도읍하였다.6) 896년 궁예가 승령현(僧 嶺縣)을 점령하였다는 기록 7)으로 보아, 이때 연천지역도 궁예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918년 왕건(王建)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건국하자 연천지역도 고려의 영토가 된다. 940년(태조 23) 고려는 전국의 고을 이름을 고쳤다.8) 이때 연천지역은 장주(獐州)로 이름 이 바뀌었다. 995년(성종 14) 고려는 장주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다가 1005년(목종 8)에 폐지하였다. 1018년(현종 9) 장주는 다시 동주(東州: 지금의 철원)에 소속시켰다가 1175년(명 종 5)에 철원에서 독립시켜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1309년(충선왕 1)에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임금의 이름자를 피하여 연주(漣州)로 개칭되었다.9) 3) í��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2년. 4) 위의 책,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5) ��삼국사기�� 권35, 잡지(雜誌) 제사(第四) 지리 2. 6) 김인철, 「지방군사제도의 재편성」, ��한국사�� 9, 국사편찬위원회, 1993, 128 131쪽. 7) ��삼국사기�� 권50, 열전 10 궁예. 8) ��고려사�� 권56, 지(志) 10 지리 1. 9) 연천군지편찬위원회, ��연천군지�� 상, 2000, 1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