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六堂崔南善先生紀念碑(육당 최남선 기념비) 최근 70년간 한국의 걸어온 길은 매우 험난하고 복잡하였다. 육당 최남선 선생은 정히 이 거치른 굴곡선상에서 일생을 보낸 분으로 서기 1890년 4월 26일 서울에서 출생하여 1957년 10월 10일 68세로 서거하셨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총명과 기개가 절륜하고 호학 또 능문하였다. 소년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가 早稲田(와세다)대학에서 수학하다가 시사에 분개한바 있어 중도에 돌아왔다. 히국의 변천과 신사조의 호흡은 그의 정열을 격앙하여 16세 소년으로 신문관을 찰설하고 잡지소년과 그 밖에 각종 신구서적을 출판하는등 신문화 계몽과 신문학운동 특히 언문일치의 선구가 되시었다. 경술국치후에는 일제의 탄압과 싸워가며 이 사업을 계속하는 한편 민족문화의 발양을 위하여 조선광문회를 신설하고 웅대한 계획하에 고전의 간행과 기타 편집에 종사하니 시년이 21세라. 국내의 석학과 진서가 여기에 집중되었으니 실로 우리문화사상에 특서할일이었다. 또 3.1운동에 선생의 집필하신 독립선언서는 민족의 정기를 토로하고 동아의 대세를 총관한 대문자이다. 이 운동으로하여 영어 3년의 고를 겪은 후 주간지 '동아'와 일간지 '시대일보'을 전후 경영하여 민족의 심혼을 깨우친바 자못 컸었다. 그 후 선생은 서재로 돌아와 단군문제를 중심으로 고대신앙과 민속연구에 참심하는 한편 시조체를 빌어 심회를 읊조리시고 떄로 정지구적을 찾아 정지구적을 찾아 예찬과 연마를 새롭게하였으니 이즈음의 신작인 兒時(아시) 조선 108번뇌 백두산관참기 등은 모두 선생의 조선심발양의 명저이었다. 1929년 이원의 신라진흥왕비를 발견한것도 선생이어니와 이 신비와 종래 3비에 대한 논문은 삼국유사해제와 함께 선생의 학구적인 진목면을 들어낸것의 하나이었다. 이밖에 각종의 국사서 조선상식 기타 신문잡지에 발표된 허다한 작품중 특히 불함문화론 단군고기잔석 등 선생의 단군연구의 결정이었다. 선생이 만년의 대저로 국사사전편집에 심혈을 경주하다가 동한과 병환으로 이를 완성치 못하신 것은 참으로 천추의 한사이다. 선생의 수 많은 논저는 다 정금미옥으로 길이 전할것이오 더욱 신문학및 국사학 개척에 이바지한 공헌은 실로 높고 빛나는 것이었다. 아아 선생의 몸은 이미 가셨으나 그 정신과 업적은 우리 민족과 함께 영원히 전할것이다. 이에 우리 동지들은 이 단비를 수립하여 선생의 고덕과 위업을 기념하는 바이다.